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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원화성 읽을거리</title>
		<link>http://www.swcf.or.kr/?p=60</link>
		<description>수원화성 읽을거리 자료입니다.</description>
		<pubDate>2026-04-30 01:35:35</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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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x>153</id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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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참다운 효를 위한 또 하나의 수도首都 &amp;#39;수원화성&amp;#3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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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amp;#34;narticle&amp;#34;&gt;
&lt;p&gt;수원은 효원의 도시로 불립니다. 조선시대 위민군주 정조의 효심이 깊이 담겨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원화성을 정조의 효심이 담긴 결정체로 보기도 합니다. 정조 효의 결정체라고 하는 것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당시 수원도호부(현재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 관아가 있는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수원 팔달산 일대로 천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조의 효는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효도로 인해 국가의 엄청난 예산을 들여 수도를 옮기려고 한 것은 현재적 관점만이 아니라 200여 년 전의 관점으로 보아도 절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수원을 효원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정조가 진짜 수원으로 천도를 하려고 한 것일까요? 이 두 가지가 과연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 이 문제의 진실을 들여다 봅시다. 이 내용은 2018년 인인화락 가을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lt;/p&gt;

&lt;p class=&amp;#34;ntitle&amp;#34;&gt;정조의 진짜 효&lt;/p&gt;

&lt;p&gt;정조는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효자다. 조선 500여 년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에서도 정조는 진짜 효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조가 효자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효자의 개념인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위해 국을 끓여 주거나 아니면 추운 겨울날 몇 개의 산을 넘어 무릉도원을 찾아가서 복숭아를 따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정조의 효는 바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에 기반을 둔다. 억울하게 뒤주에서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불명예를 회복하고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복권해 주는 것이 사도세자를 위한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조는 몇 가지 특별한 행사를 추진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버지처럼 군복을 입고 행차를 다니는 것이었다. 사도세자는 15세에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다. 그래서 정조는 국왕이 되고 나서 사도세자처럼 외부로 행차를 할 때 곤룡포와 익선관을 쓰지 않고 군복을 입고 전립을 썼다. 그리고 1791년(정 조 15)에 사도세자가 했던 것처럼 군복을 입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물론 이 초상화는 사도세자를 수원으로 이전한 묘소인 현륭원 재실에 걸어놓고 살아계실 때 행하지 못한 효도를 행하겠다고 했다.&lt;br /&gt;
정조는 사도세자가 진정한 무인군주(武人君主)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가 만든 18가지의 무예에 마상기예 6기를 추가해 24가지 무예로 만들었다. 이 무예서가 바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다. 『무예도보통지』 서문에 자신은 아버지가 한 일을 따랐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이야기 한다. 조선의 무예를 새롭게 정리하여 중국과 대등한 군사체제를 갖추고자 한 모든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유업이고 자신은 그 유훈을 계승한 것이라는 것을 백성들과 신료들에게 이야기해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항상 무예를 수련하고 활쏘기를 했다. 조선 역사상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최고의 명궁(名弓)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lt;br /&gt;
정조가 대궐 밖으로 행차를 할 때 반드시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다. 그 이유도 사도세자가 온양으로 행차할 때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갔기 때문이다. 가마를 타거나 곤룡포를 입을 수 있었음에도 사도세자는 군복을 입고 직접 말을 몰았는데, 이러한 행동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조는 아버지를 따라 늘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다. 이것이 바로 정조 효의 핵심이다. 정조가 이러한 효를 실천하기 위한 터전으로 선정한 곳이 바로 수원이었다.&lt;/p&gt;

&lt;p class=&amp;#34;ntitle&amp;#34;&gt;정조는 왜 수원신읍치를 만들었는가?&lt;/p&gt;

&lt;p&gt;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수원도호부 관아 일대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봉하고, 관아를 비롯한 읍치 전체를 현재의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일대의 팔달산 동쪽 지역으로 이전했다. 도시를 옮긴지 4년이 지난 1793년(정조 17) 1월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壯勇營外營)을 신설했다. 도호부는 정3품 부사가 다스리는 큰 고을이었다. 하지만 유수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수부는 정2품 이상의 유수가 다스리는 지역으로 한성부와 버금가는 고을이었다.&lt;br /&gt;
수원의 지명은 대부분 지역의 특징과 관련 있거나 물과 연계된 이름, 또는 수원화성과 연관된 이름이 많다. 그중 율천동이란 율전동과 천천동을 합한 동네다. 먼저 율전동은 율천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옛날 이 동네는 밤나무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밤밭이라고 불렸고 지금의 이름인 율전동은 바로 이 밤밭을 한자로 쓴 것이다. 천천동은 율천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옛날부터 이 동네에는 큰 샘물이 있어서 큰 내를 이루어 서호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래서 샘내 마을 또는 이를 한자로 표현한 천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즉 천천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amp;lsquo;샘내가 있는 마을&amp;rsquo;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자동은 정자1동과 정자2동으로 나누어져 있는 동네다. 정자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이 동네에는 영화정 등의 정자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정자동이라는 이름은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화서동은 화성의 서문을 화서문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동네에 있다. 그래서 화서문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화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화서1동과 화서2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연무동은 법정동으로 연무동, 상광교동, 하광교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동네에는 연무대가 있다. 이곳은 옛날 군사 훈련과 무술 연마를 하던 곳으로 동네 이름도 연무동이라 하게 되었다. 우만동은 우만1동과 우만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네인데, 옛날 이 동네에 최씨와 임씨 등이 소를 많이 키우며 살았기 때문에 우만이 또는 소만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했다. 지동의 동네에는 옛날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인 &amp;lsquo;지(池)&amp;rsquo; 자를 써서 &amp;lsquo;지곡&amp;rsquo;이라 불렀다. 지금은 지동이라 부르는데, 이는 지곡이라는 옛날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따라서 지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연못이 있는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매교동 안에는 매교동과 교동 2개 동의 법정동을 두고 있다. 매교동에는 조선 시대 정조 대왕이 행차하실 때 지나던 다리였던 매교가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매교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매교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매교라는 다리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정조는 수원이라는 도시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amp;lsquo;화성(華城)&amp;rsquo;이란 이름의 화(華)는 3가지의 의미가 담겨있다. 바로 부유함(富), 건강하게 오래 살기(壽), 인구번성(多男子)의 의미이다. 이 3가지의 뜻이 담긴 화(華)자를 넣어 도시를 만들고, 진정 아버지가 묻혀 있는 새로운 고향인 수원을 화(華)의 도시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화성유수부의 승격은 1년 뒤에 있을 화성축조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화성 축성은 왕권을 강화하여 민생안정을 추구하는 정조의 장기적인 정국 운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화성유수부를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배후도시로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화성유수부 승격과 더불어 장용외영을 신설한 것이다. 사실 정조가 수원 팔달산 일대를 선택한 것은 실학의 비조라고 불리는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읽었기 때문이다. 반계 유형원은 팔달산 일대가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천하 교통의 요지이고, 이곳에 성곽을 쌓는다면 한양을 보호할 수 있는 대도회(大都會)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정조는 이 글을 읽고 오래전부터 수원 팔달산 일대를 유심히 조사했고, 마침내 때가 되어 효종이 돌아가신 이후 천하의 길지로 알려진 수원 화산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고, 그 일대에 있는 관아와 각종 공공기관 그리고 백성들의 집을 팔달산 일대로 이전하게 했다.&lt;br /&gt;
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외영을 설치하여 화성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하는 조처를 단행 했다. 이는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일로 지방의 일개 고을이 국왕의 친위도시로 거듭나는 일이기도 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를 신설하면서 수원지역이 자신을 비롯한 왕실의 고향과 같이 중요한 곳이며 따라서 지위를 격상시켜야 하며 수원지역의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조는 초대 화성유수로 1790년부터 좌의정으로 독상(獨相)체제를 유지한 채제공을 임명했으니 화성유수부와 장용외영의 신설이 갖는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국왕을 제외한 최고의 고위관료를 특지로 화성유수에 임명한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정조 자신이 추진하는 왕권을 강화해 새로운 경장정책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 신설되는 화성유수부의 수장이 조정 내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 임명되어야만 그에 따른 다양한 정책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amp;#34;ntitle&amp;#34;&gt;화성을 또 하나의 수도로 건설하라&lt;/p&gt;

&lt;p&gt;정조는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면서 그 이후 장기적인 계획을 준비했다. 바로 수원을 새로운 또 하나의 수도로 만드는 일이었다. 기존 수도인 한성부와 함께 자신이 머물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도를 말이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화성 건설을 추진했다. 정조가 더 일찍 화성건설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94년(정조 18)에 시작한 것은 정조에게 숨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세자를 얻었다. 훗날 순조가 된 세자가 태어난 해는 1790년이다.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원에서 머물기를 희망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세자의 복권 때문이었다.&lt;br /&gt;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고 난 후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사도세자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세자에 대한 칭찬을 해도 그것을 역모라고 규정지을 정도였다. 그리고 세손인 정조에게 훗날 국왕이 되었을 때 절대로 사도세자를 역적의 죄목을 벗기고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게 하는 특명을 내렸다. 이러한 할아버지 영조의 명령 때문에 정조는 자신이 국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높이 받들지 못했다. 조선시대 국왕이 돌아가신 자신의 생부(生父)를 국왕으로 받드는 일이 실제로 존재했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 &amp;lsquo;정원군&amp;rsquo;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게 했다. 정조 역시 사도세자를 이처럼 추존하고 싶었으나 할아버지 영조의 엄명으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조는 묘책을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 15세가 되면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는 것이다. 새로 국왕이 된 세자가 할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게 하는 방식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머물 수원에 성곽 쌓기를 1794년에 시작한 것이다. 성곽이 3년 만에 완성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10년 걸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794년에 시작하면 1804년에 완공이 되고, 그 해가 바로 세자가 15세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가 계획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lt;br /&gt;
그래서 정조는 화성행궁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늘리며 수원을 상왕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한양은 주상(主上)의 수도, 수원(화성)은 상왕의 수도로 정조가 계획한 상왕은 주상보다 훨씬 권한이 센 것이었다. 상왕은 조선 모든 관리들의 인사권과, 사법권 그리고 군대통수권을 갖는 것이다. 이는 조선에 전례가 있었다. 바로 태종이 세종에게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었을 때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태종과 세종대의 역사를 정조는 그대로 계승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수도 한양은 이미 노론으로 대표되는 기득권들이 좌지우지하는 지역이었다. 국왕 정조가 아무리 개혁을 추진한다 하라도 이들 기득권이 따라주지 않고 오히려 맞대결을 벌인다면 정조로서는 큰 낭패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수원을 자신의 개혁의 터전으로 삼아 조선 전체를 개혁하는 또 하나의 수도로 만들고자 원대한 꿈을 품고 화성을 축성한 것이다.&lt;/p&gt;

&lt;p class=&amp;#34;pd_b20&amp;#34;&gt;&amp;nbsp;&lt;/p&gt;

&lt;p&gt;인인화락 2018년 가을호 Vol.24&lt;br /&gt;
글 | 김준혁(한신대학교 정조교양학과 교수) 사진 | 수원화성박물관, 수원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 수원문화재단&lt;/p&gt;

&lt;p class=&amp;#34;pd_b20&amp;#34;&gt;&amp;nbsp;&lt;/p&gt;
&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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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18-11-06 14:48:33</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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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mp;#39;화성성역의궤&amp;#39; 도설(圖說) 속 그림과 수원화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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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한반도에는 2천 개가 넘는 성곽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수원화성은 가장 뛰어난 성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남긴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입니다. 축성이 끝난 후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의 모든 내용이 담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편찬하도록 명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록된 『화성성역의궤』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 그려진 화성 시설물의 그림과 설명은 이후 보수와 복원에 적극 활용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복원사업에 가장 필요한 자료로 활용됩니다. 이는 훗날의 본보기로 삼고 후손들이 참고할 것을 예측했던 정조의 혜안이었습니다. 2017년 인인화락 가을호에 소개된 화성성역의궤 도설 속 그림과 수원화성에 대한 내용입니다.&lt;br /&gt;
&lt;br /&gt;
&lt;b&gt;&amp;#39;화성성역의궤&amp;#39; 그림의 역할&lt;/b&gt;&lt;br /&gt;
수원화성을 호칭하는 대표적인 미사여구는 바로 &amp;lsquo;한국 성곽의 꽃&amp;rsquo;이다. 수원화성이야말로 우리 조상의 뛰어난 기술과 정신이 집약된 한국 전통건 축물의 정점이다. 20년 전인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력하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는 수원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사였다. 한국에서 성곽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다.&lt;br /&gt;
당시 수원화성은 등재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위원회는 복원된 유적지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조대왕의 개혁의지가 담긴 수원화성이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시설물과 성곽이 훼손되었고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파괴된 시설물이 복원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불식시킬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덕분이었다. 1997년 4월 유네스코에서 파견된 스리랑카 문화재 전문가 실바(Nimal De. Silva)교수에게 수원 출신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이 『화성성역의궤』 영인본을 선물하였고 이로 인하여 수원화성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민선1기 시장이었던 심재덕 전 시장의 역할이 컸다. 수원화성이 등재되기 20여년 전 1970년대에 실시되었던 &amp;lsquo;수원성복원정화사업&amp;rsquo;의 실무자들은 당시 사라지고 훼손된 상당수 시설물에 대한 복원을 위하여 여러가지 자료를 참고하였다. 이중 가장 많이 참고한 것이 『화성성역의궤』 이며 가장 앞부분인 권수(卷首)의 도설(圖說) 부분이었다. 도설은 화성의 그림과 설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수원화성의 전체적인 모습부터 주요 시설물의 내외 모습, 거중기를 비롯한 축성 도구와 주요 행사에 이르기까지 수원화성 축성에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져 있다. 수원화성이 완벽에 가깝게 복원될 수 있었던 것도, 훗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도 『화성성역의궤』 도설의 영향이 컸다. 현재도 미복원된 수원화성의 시설에 대한 조사에 적극 활용된다. 가장 단적인 예로 동북공심돈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외면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아있는 도면이나 내부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훗날 복원할 때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도설이 존재했기 때문에 나선형 계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설은 외도(外圖)&amp;middot;내도(內圖)&amp;middot;이도(裏圖)&amp;middot;전도(全圖)&amp;middot;분도(分圖)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도는 외도와 내도의 건축그림 중 정면을 자르고 내부공간을 묘사한 그림으로 등각투상도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성성역의궤』에만 있으며 서북공심돈, 동북공심돈, 포루(砲樓) 등 3개의 이도가 있다. 또한 이도에서는 누각을 없애고 정확한 비례를 맞춘 것이 아닌 내부에 대한 자세한 묘사에 공을 들여 표현에 있어 효과를 높였다.&lt;br /&gt;
한편 도설 속 그림과 실제 모습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 『화성성역의궤』 자체가 조선시대 『영건의궤(營建儀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형식과 방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어 완벽하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완벽하다기 보다는 &amp;lsquo;완벽에 가까운&amp;rsquo; 책이다. 자세하고 치밀하게 화성 성역의 모든 것을 담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실물 자체를 완전하게 그림으로 옮긴 것이 아닌 해설을 위한 그림이기 때문에 미필적인 왜곡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따금 연구자들이 수원 화성 복원에 대해서 도설과 다른 부분에 대한 오류 제기를 하는데 주장 중 일부는 타당하며 일부는 지엽적인 부분도 있다. 도설이 완벽하다는 관점이라면 팔달문 지붕 잡상 숫자나 석재 숫자까지도 의궤에 맞춰야한다. 그러나 실제는 절대 그렇지 않다. 한정된 크기의 지면에 건물의 특성을 그림으로 표현함에 있어 실물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970년대 복원사업이나 현재의 복원사업도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의궤 그림과 다르다고 무조건 잘못된 복원이라는 것은 다소 무리인 주장이다.&lt;br /&gt;
&lt;br /&gt;
&lt;b&gt;&amp;#39;화성성역의궤&amp;#39; 도설과 실제 시설물 비교&lt;/b&gt;&lt;br /&gt;
『화성성역의궤』 권수 도설 그림 중 현재 모습 중 실제 모습과 차이가 있는 것 일부를 보자면 먼저 장안문과 팔달문의 예를 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옹성 위의 누각이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 장안문과 팔달문 옹성 위의 누각은 원래 만들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화성성역의궤』에 기재되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 옹성 위 누각은 1824년(순조 24)에 만들어졌다. 이는 축성 이후 최초로 수원화성 건축물의 변화였다.&lt;br /&gt;
위급상황에 봉화를 올리는 봉돈의 도설을 보면 원래 봉돈 입구 좌측의 무기고, 우측의 숙직소는 결코 성곽 밖에서 볼 수 없다. 의궤 도설에는 시설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일부러 사실과 다르게 그린 것이다.&lt;br /&gt;
정조가 을묘년인 1795년에 팔달산 정상에 올라 군사훈련을 하던 서장대를 보면 서장대 후미에 서노대가 있으며 그 중간에 군사가 숙직을 하던 후당(군직소)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amp;lsquo;수원성복원정화사업&amp;rsquo; 때 후당복원은 열외였으며 현재까지도 미복원 상태이다.&lt;br /&gt;
동북공심돈 이도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종의 투시도이며 공심돈 상단에 누각이 빠져있다. 이는 내부 표현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다. 의궤 속 그림의 동북공심돈은 원형에 가까우나 현재 모습은 타원형에 가깝다. 이에 대해 잘못된 복원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의 사진을 확인해 보면 남아있는 시설물 하부를 기준으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수원화성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남각루(방화수류정)는 한국의 정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외형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방화수류정에 오르는 계단은 원래 2개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수리하는 과정에서 좌측 계단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lt;b&gt;수원화성의 미복원 시설물&lt;/b&gt;&lt;br /&gt;
정조의 서거 이후에도 수원화성에 대한 관리와 보존은 충실히 지켜졌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일제는 수원화성에 대하여 방치와 고의적인 훼손을 하였고 필요에 의해서만 제한적으로 관리했다. 그리고 도로를 내기 위하여 화성 성곽 구간 중 무려 11군데의 구간을 철거했다.&lt;br /&gt;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위원회의 권고로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고 부득이하게 복원하기 어려운 부분은 육교로 성곽잇기 공사를 실시하였다. 대표적인 예는 2006년도에 실시된 장안문 성곽잇기 공사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이후 팔달문과 마찬가지로 로터리 형태를 유지했으나 2006년도의 공사 이후 장안문에서 북서적대 구간은 성벽 전체를 다시 복원했고 북동적대 방향은 육교 형태로 복원했다.&lt;br /&gt;
1846년(헌종 12) 수원천 일대의 성곽이 홍수로 인해 훼손되었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수원천 일대는 수해를 겪었다.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적합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1922년 여름의 기록적인 홍수는 화홍문과 남수문, 매향교를 완전히 파괴시켰다. 일본은 강제로 병합한 식민지의 유적지 복원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남수문 주변의 성벽을 고의로 철거하였다. 그 때문에 남수문을 비롯하여 남암문, 남공심돈, 남동적대, 남서적대, 남은구 등의 시설이 사라졌다. 이후 이 일대가 시가지화 되었기 때문에 1970년대 수원성복원정화사업 때도 이 구간을 복원하는 것은 가능했으며 지금까지도 복원이 어려운 상황이다. 성곽 대부분을 복원하고 도로가 만들어져 불가피하게 복원할 수 없는 성곽은 보도육교 형태로 성곽잇기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남공심돈 주변만큼은 복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남치에서 팔달문, 팔달문에서 남수문 사이의 미복원 성곽 구간은 약 300m 정도이다. 성곽 시설물 중 복원하지 못한 곳은 총 11개소이다. 4대 문 뒤에 위치한 수문청 4기, 남암문 북은구(北隱溝)와 남은구, 남공심돈, 중포사, 남동적대, 남서적대 등이다.&lt;br /&gt;
화성행궁은 일제의 강제병합 전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자혜의원이 들어섰다. 조선시대 최고의 행궁인 화성행궁은 낙남헌을 제외하고 전부 철거 되었다. 현재 화성행궁은 2000년대 초반에 복원된 것이며 원래 건물이 전부 복원되지는 않았다. 현재 미복원 된 화성행궁 건물은 장춘각, 별주(분봉상시), 우화관 등이다. 남은구로 물이 빠져나가던 남지(南池), 북은구로 물이 빠져나가던 북지(北池), 수원화성박물관 주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지(東池) 등의 연못들은 현재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 외 부대시설 중 미복원 된 것은 서장대와 14 SWCF Magazine 2017 Autumn 15 서노대 사이에 있던 후당(後堂), 감영(監營)이 설치된 지역의 군무(軍務)를 맡아보는 관아인 이아(貳衙), 화성유수부의 군무를 담당하던 중군(中軍) 관할의 중영(中營), 별군관청, 형옥, 강무당, 무고, 수성고, 남창, 북창, 동창, 영화역, 사직단, 지소 등이다.&lt;br /&gt;
2010년대 이후 수원화성의 미복원 시설이 복원되는 몇 가지 사례가 있었다. 1922년 홍수로 인해 사라진 남수문은 90년 만인 2012년에 복원되었다. 일제에 의해 사라졌던 성신사 (城神祠)는 2009년에 복원되었다. 2015년에는 이아 터가 발견되어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직단(社稷壇)과 문선왕묘(文宣王廟)터에 대한 발굴조사도 이루어진 상태이다. 또한 우화관의 복원계획에 따른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이후의 복원을 기대해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인인화락 2017년 가을호 Vol.20&lt;br /&gt;
글 | 조성우(수원화성박물관 전문위원)&lt;/p&gt;
&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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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화성원행도로 보는 1795년 그때 그 순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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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즉위 초만 하더라도 수차례의 암살 기도에 내몰리기도 했던 정조 임금이 즉위 20주년을 맞아 보란 듯이 7천 명에 가까운 행렬을 거느리고 생부인 사도세자(정조 즉위 후 장헌세자로 추존함)가 묻혀 있던 화성을 찾는 길이었다.&lt;br /&gt;
1795년은 동갑내기이던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 정조는 생부의 원소가 있던 이곳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을 위한 성대한 잔치를 계획하였다. 33년 만에 어머니에게 남편의 무덤을 참배하게 하고 어머니 집안의 친인척들을 모아 회갑연을 베푸는 것이었다. 마침 한 해 전부터 건설에 들어가 위용을 드러낸 화성의 모습을 내외에 과시하기에도 안성맞춤인 때였다.&lt;br /&gt;
직접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행차인 만큼 그 준비도 철저했다. 화성 건설 대역사를 총괄하던 총리대신 체제공을 비롯하여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주축을 이룬 정리소를 전담부서로 설치하여 행사를 관장하게 했다. 한강에는 배다리(舟橋)를 건설하고 혜경궁이 타고 갈 가교(駕轎)도 새로이 제작했다. 무엇보다 뜻깊은 것은 이 행사가 철저하게 백성과 함께 하겠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 위에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예산의 집행과 행사 기획 곳곳에 정조 임금이 특별 지시한 여민동락의 정신이 구현되었다. 왕권의 강화가 자신을 괴롭히던 신권을 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하기 위한 것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어심이 그대로 드러난 쾌거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1795년 윤2월 초 9일 7시경에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배다리를 건너 노량의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만안현을 넘어 문성동(文星洞) 앞길에서 잠시 휴식한 후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 날, 이른 시각에 출발하여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길을 떠나 오후에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셋째 날, 공자의 사당(聖廟)에 참배하고 화성&amp;middot;시흥&amp;middot;과천지역 백성을 대상으로 문무과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봉수당에 나아가 이틀 뒤에 있을 진찬 예행연습에 참여하였다. 넷째 날,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을 참배하고 오후에 서장대에서 군사훈련을 점검하였다. 다섯째 날, 봉수당에서 혜경궁에게 진찬을 올렸다. 여섯째 날, 신풍루에서 친히 백성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 주고 오후에는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일곱째 날, 화성행궁을 떠나 시흥행궁에서 하룻밤 묵고 여덟째날 환궁하였다.&lt;br /&gt;
이 모든 과정은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화성에서 거행된 각종 행사는 8폭 대형 병풍 《화성원행도병》으로 기록되어 오늘날에도 당시의 행사 장면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또한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도 그림으로 시각화되었다. 성대한 행사 기록화와 목판으로 인쇄된 의궤의 각종 그림들은 조선시대 왕실 기록화의 역사를 새로 쓰는 신기원을 이룬 것이기도 하다.&lt;br /&gt;
창덕궁에서 화성행궁까지의 거리는 63리(당시의 10리는 오늘날의 약 5.4㎞)였고 화성행궁에서 현륭원까지는 20리였다. 실제 행차에 참여한 인원은 어느 정도였을까? 원행에 앞서 윤 2월 3일 정리소에서 아뢴 바에 따르면, 원행을 수가할 군사는 어가를 호위할 군병 2380명, 화성에서의 군사훈련에 참여할 군병 3700명, 각 군영의 수하병사 1000여 명을 합하여 6900명이었다. 여기에 혜경궁의 회갑연에 초대된 내외빈과 각사의 관원이 추가되어 실제 배종한 인원은 7200여 명에 달하였다.&lt;br /&gt;
성대한 행차 장면은 《화성원행도병》 중 2폭,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와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에 묘사되어 있다. 화성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시흥행궁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환어행렬도〉는 1㎞가 넘는 장대한 행렬을 지그재그 식으로 상하 긴 화면에 압축하여 묘사한 것이 일품이다. 행궁에 막 도착한 선두 행렬이 주변에 대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고 기마대와 대기치들을 앞세우고 혜경궁의 가교와 말을 탄 정조 임금, 그 뒤로 수가하는 행렬이 아스라이 이어져 있다.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 연도에 가득 밀집한 백성들, 정연한 대오를 갖춘 행렬이 장대하게 묘사된 그림이다. 〈한강주교환어도〉는 총 36척의 배를 연결하여 만든 배다리의 모습이 특별히 부각되어 있다(도 2). 어머니를 모시고 행차하는 왕의 행렬은 당시 백성들에게 굉장한 볼거리였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관광민인들을 이 역사적인 현장에 이들을 동참시키고자 한 통치자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원행반차도〉, 규장각소장 〈화성원행반차도〉,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가 그것이다. 이들 행렬도에는 병풍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대열편성 상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화성원행반차도〉는 45미터에 이르는 긴 행렬도로 6400여 명이 그려져 있어 실제 행렬에 가장 가깝다. 한편 규장각의 〈화성원행반차도〉와 의궤의 〈반차도〉는 1490여 명의 사람과 520필 정도의 말이 등장하고 있어 실제 행렬의 20% 정도만 묘사되어 있다. 보병과 마병의 숫자를 대폭 줄였고 품계에 따라 장수와 관원들이 거느리던 종자들을 대부분 생략하였기 때문이다.&lt;br /&gt;
의궤의 〈반차도〉를 토대로 행렬 편성을 살펴보자. 행렬은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도가(導駕) 행렬, 전방호위군인 선상군 행렬, 왕의 친위대인 금군, 혜경궁의 가교와 정조의 행렬, 장용영과 배종 관원, 가후 &amp;middot; 난후 금군, 후방 호위군 행렬로 편성되었다. 보통 도가 행렬은 행차하는 곳의 지방관이 맡았으므로 경기감사가 선두에 섰고 행사를 총괄한 총리대신 채제공이 다음에 섰다. 채제공은 화성에 먼저 가서 업무를 총괄하다가 윤2월 10일 화성의 장안문 전 진목정(眞木亭)에서 장용 외영의 군사들과 함께 어가를 맞았다. 하지만 행렬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도가 행렬의 책임자로 등장시킨 것이다. 다음으로, 전방 호위군인 선상군은 훈련도감에서 맡았다. 선상군에는 마병 200명과 보병 240명을 훈련도감 대장이 지휘하고 있다. 마병은 5기씩 대열을 이루어[五馬作隊] 행군하고 보병은 2열 종대를 이룬 3개 대가 나란히 행군하는[三隊平行]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음으로 금군과 가전별초군이 시위하고 이어 의장기가 섰다. 의장기는 도성 안에서만 배치하고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환궁할 때 다시 진열하는 것이 관례였다.&lt;br /&gt;
이어 정조의 가교와 둑, 용기가 서고 장용영 취고수 51명으로 이루어진 취타대와 대기치들이 배치되었다. 둑과 용기는 군대의 대장을 상징하는 기치이며, 취타대와 대기치들은 군사 대열을 통솔하는 데 필요한 악대와 깃발류이다. 군사 대열에서 &amp;ldquo;장관과 병졸은 귀로는 징과 북소리만 듣고 눈으로는 깃발의 모양과 색깔만 보아야 하며, 어떠한 사람이라도 말로 하는 지시는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되었다.&amp;rdquo; 즉 전체 대열을 지휘 통솔하는 최고 통수권자로서 국왕의 지위를 드러내고 실제로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것이다.&lt;br /&gt;
행렬의 중심인 어가 부분은 삼엄한 호위체계를 보여 준다. 선전관, 별군직, 어가를 특별 수행하는 장관들, 혜경궁의 가교용 예비 말, 왕의 갑옷을 실은 말, 왕의 예비 말들이 앞에 배치되고 혜경궁의 가교, 정조가 탄말이 나아갔다. 정조의 말 앞에는 근장군사와 무예청 군사 &amp;middot; 별감 &amp;middot; 순뢰수들이 특별 시위를 하였고, 의금부 도사가 이끄는 나장들이 정소인이나 격쟁인의 어가 접근을 통제하였으며, 무예청에서 작문(作門)하여 어가 주변을 호위하였고 협련군 300인이 어가를 에워쌌으며 그 뒤를 창검군이 다시 호위하였다. 무예청 무관들이 &amp;lsquo;문(門)&amp;rsquo;자 모양으로 시위 대열을 만들어 엄격히 출입을 통제하는 작문 시위 모습, 협련군과 창검군이 겹겹이 에워싼 국왕 호위 체계는 정조가 특별히 강조해 오던 시위 방식이었다.&lt;br /&gt;
이어 군주들이 탄 쌍교 2채와 외빈이 서고, 서리와 주서 &amp;middot; 한림 &amp;middot; 약물 대령 의관 &amp;middot; 등촉방 중관 &amp;middot; 가후 선전관 등 근신들이 수가하였다. 그 뒤로는 장용영의 마병 300명과 장용대장이 나아갔고 장용영 보병 240명, 승정원의 도승지와 승지들, 규장각 각신, 내국과 장용영 제조가 따랐다. 이어 가후금군 50인이 오마작대하여 나아갔고, 표기와 병조판서, 동반과 서반 관원들, 장용영 보병 360명이 섰다.&lt;br /&gt;
이 행렬은 정조가 원행할 때 편성하던 군사적 대오에다 도가, 혜경궁의 가교 행렬과 외빈 행렬을 추가한 것이다. 정조는 평상시 능원에 행차하면서 배종 군사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행하였고 행차 시에는 행렬 편성 지침을 반드시 엄수하도록 하였다. 군사와 장수는 물론이고 관원들까지 모두 화성에서의 군사훈련을 감안하여 군복인 전복과 전립 차림으로 행렬에 참가하고 있는 데서도 행렬의 군사적 성격을 알 수 있다.&lt;br /&gt;
도식적으로 묘사된 규장각의 〈화성원행반차도〉가 의궤에서 세련된 행렬도로 탈바꿈한 것은 정조의 어심이 반영된 결과이 기도 하다. 원행의 의의를 후세에 증명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정조의 특별하교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당시 행차를 &amp;ldquo;의(義)로써 처음으로 일으킨 일이고 예(禮)는 정리(情理)를 따른 것이므로 마땅히 징신할 만한 서책을 만들어 후인에게 보여야 한다&amp;rdquo;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화원들 역시 그러한 국왕의 생각을 그림 작업에서 구현하여 늘씬한 조형의 인물들이 사실적으로 행군하는 행렬도로 재탄생시켜 의궤에 수록하였던 것이다.&lt;br /&gt;
위에서 본 세 행렬도들은 단일 행차를 기록한 그림으로서도 유례가 없다. 이들 그림들은 당당한 군사적 대오를 갖춘 가운데 어머니를 모시고 행차하는 국왕의 행렬을 시각화함으로써 효(孝)의 이미지와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동시에 상징하는 거둥 행렬도로 자리잡게 된다. 정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대로 &amp;ldquo;행행(行幸)이 백성들에게 고통스러운 노역(勞役)의 현장이 아니라 임금의 은택이 베풀어져 행운(幸運)을 주는&amp;rdquo; 행행도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역사, 행렬도의 역사까지 새로 쓰게 한 대사건이었다. 의리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 핍박받던 정조가 백성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당당한 군주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lt;br /&gt;
&lt;br /&gt;
인인화락 2016년 가을호 Vol.16&lt;br /&gt;
글 : 제송희(한국학중앙연구원 백과사전편찬실연구원)&lt;/p&gt;
&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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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2018-04-02 18:39:05</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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