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인물 포커스 1] 한국 SF의 전설 라이파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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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 유도창을 들고 있는 라이파이, 녹의 여왕, 제비기 등 주요 캐릭터들을 그린 삽화.
한국만화시리즈(1999) 우표도안으로 원화는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에 전시돼 있다.


[인물 포커스 1] 라이파이 작가 김산호 (SF만화가)

한국SF의 전설 라이파이를 만나다



글 조성면 창작지원팀장·문학평론가 사진 김신



‘라이파이’는 한국SF만화의 전설이다. 또 성공적인 최초의 토종 영웅캐릭터이기도 하다. 배트맨과 슈퍼맨처럼 세대와 국적을 초월한 영웅이 있는가 하면, ‘마징가 Z’나 ‘태권 V’처럼 세대성과 국적이 뚜렷한 캐릭터도 있다. 전지전능한 ‘슈퍼 로봇’에서 여러 가지 한계와 제약이 있음으로 인해 더욱 더 강렬한 현실성과 동시대성을 갖는 ‘리얼 로봇’도 있다. ‘라이파이’는 세대성과 현실성을 갖는 슈퍼영웅이자 한국SF만화의 새 지평을 연 토종 캐릭터라는 점에서 마니아들과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설로 통한다. 한 옥션 사이트에서 ‘라이파이 만화’가 권당 4천만 원에 팔려나갔다는 일화도 있다.
가을의 끝자락. 용인시 처인구의 외곽에 자리한 김산호 화백의 만몽재(卍夢齋)를 찾았다. 만몽재는 화백의 자택을 겸한 작업실의 당호다. 빌라 한 층을 한옥처럼 개조한 솟을대문도 인상적이었고, KFC 샌더스 할아버지 같이 넉넉한 미소가 방문자의 긴장을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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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단군쥬신을 세운 제1대 단군의 영정. 상고사 연구 및 복원작업의 일환으로 김화백은 총 47대에 이르는 단군영정을 그려냈다
(오른쪽) 김산호 화백



“모든 것이 열악했던 시대, 우리한테도 슈퍼 히어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과학기술과 경제는 뒤처졌어도 그림으로는 따라잡을 수 있잖아! 그게 라이파이를 그리게 된 동기예요.”
한국만화나 SF에 대한 마니아가 아니라면, 요즘의 젊은 독자들에게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1959)는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라이파이』는 1907년 줄 베른의 『해저2만리』를 번역한 자락당(自樂堂)의 『해저여행기담』에서 시작된 한국SF가 번역사에서 벗어나 마침내 창작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김동인의 실험적인 단편소설 「K박사의 연구」를 거쳐 한국 최초의 장편 SF인 문윤성의 『완전사회』가 1966년에 나왔으니 『라이파이』의 획기성은 더욱 빛난다.
“라이파이는 남훈사의 부엉이 시리즈로 나왔는데, 처음에는 원고도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엄청났지요. 초판이 나오자마자 출판사 직원이 바로 갈비반 짝을 사들고 찾아오더라고. 그때 공무원 사무관 월급이 4~5천원할 땐데 한 편당 50만원을 넘게 벌었으니까. ‘라이파이’가 나오는 날에는 수십 수백 명씩 만화 대본소에 줄을 섰어요. 바로 산호스튜디오를 만들었고, 소속 작가들만 80명이 넘었지요. ‘태권 V’의 김청기 감독도 그때 같이 일했지요.” 현대 장르판타지의 아버지로 꼽히는 톨킨(J. R. R. Tolkien, 1892~1973)이 『호빗』·『반지의 제왕』·『실마릴리온』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판타지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 동기가 영국 고대신화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창작의 동기나 예술적 지향만을 놓고 본다면, 장르는 달라도 김산호 화백을 한국의 톨킨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슈퍼맨의 상징이 ‘S’자이듯 라이파이의 상징은 순 한글인 ‘ㄹ’자이다. 한민족 상고사와 민족의식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평지돌출이 아니었던 셈이다.
“태어난 데는 만주 봉천이지만, 진짜 고향은 현재 신문로 한국일보 주차장 자리에요.”라이파이로 유명세를 타고도 고국을 떠난 것은 그 때 그 시절 때문이었다. 라이파이에는 언론은 물론 만화조차도 철저하게 가위질을 당하던 철권 통치시대의 아픔과 상처가 화석처럼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라이파이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정보요원들이 몰려 들어왔어요. 데뷔작인 ‘황혼의 빛난 별’의 ‘별’이 일성(日星)이니 김일성을 뜻하는 게 아니냐, ‘라이파이’에 인공기와 똑같은 별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등의 이유로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일주일 내내 혹독하게 고초를 겪고 나자 창작의 자유를 위해 검열이 없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지요.”
한국SF의 역사와 만화사에 전4부작 32권의 대작 시리즈를 남겼던 한국만화의 아이콘 김산호 화백은 고국을 떠나 도미를 결행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산호 화백은 마블 코믹스, DC코믹스와 함께 3대 코믹스로 꼽히던 찰튼 코믹스와 손잡고 『샤이안 키드(Cheynne Kid)』 등 600여권의 단행본을 발표하고, 13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산호그룹을 경영하는 CEO가 된다. 이 때 우연히 『구약성경』이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국가 중심의 역사가 아닌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주장하는 유태인 출신의 계열사 사장들과 논쟁을 거듭하면서 김산호 화백은 국사(國史)가 아닌 민족사(民族史)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상고사 공부에 매달린다. 그리고 디아스포라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심을 하게 된다.
“국가와 국적의 관점에서 난 미국사람이지만, 내가 어째서 미국인인가요. 민족사의 관점에서 난 명백히 한국인이지요. 현재 한반도와 부속 도서를 국가로 보는 영토사나 반도사가 아니라 유태인처럼 민족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고대사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문제 또 분단문제를 넘어 민족사로 통합과 통일이 가능합니다. 바로 사업을 접고 만주·바이칼호·오키나와 등지로 답사를 다녔습니다. 중국에서 만주어 서적 등 상당량의 고서와 희귀 자료들을 보았는데, 반출이 금지되어 있어 자료들을 깡그리 복사해 가지고 나왔어요.”
김정빈의 구도소설 『단』(1984)이 나온 이후부터 『환단고기』 등 정신수양과 상고사 관련 서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시대의 분위기를 타고 1993년에 출간된 ‘한민족 역사 다큐만화’ 『대쥬신제국사』가 또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대쥬신제국사』는 기존의 역사적 상식을 뒤엎는 것이어서 학계에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판타지로 보는 반면, 식민사관과 메마른 실증사학에 지친 재야사학자들과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의 파격적인 주장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엄정한 학문적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대쥬신제국사』가 이현세 화백의 『천국의 신화』(1997)의 계기가 된 대작 그래픽노블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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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몽재에서 한국 상고사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김산호 화백.



“고구려의 수도가 어디에요. 집안(集安)이죠. 집안을 그대로 발음하면 뭐가 됩니까? 말 그대로 집안이에요. 국내(國內)라는 뜻이죠. 고구려 말을 이두로 표기한 것입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어디에서 왔어요. 졸본(卒本)이죠. 강단사학에서는 졸본이라고 표기하고 그냥 끝이에요. 졸본은 고대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던 지역, 그러니까 지금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촐본’이란 말입니다. 고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비류’도 만주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비류호수’에서 나왔습니다. 언어에는 민족의 역사와 경험이 다 들어있습니다. 한자음을 빌려 표기한 것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중국의 역사왜곡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아시지요. 신라 경순왕의 후예들이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지은 안동(安東)도 어느새 단둥(丹東)으로 바꿔버렸잖아요. 조선(朝鮮)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고어(古語)인 ‘쥬신’의 한자식 차음이죠. 강단사학과 식민사학의 폐단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 중요하고 정말 시급합니다.”
만 가지 꿈을 뜻하는 ‘만몽’이란 호처럼 다큐 아티스트(docu-artist)의 사고와 상상력은 여전히 젊고 열정적이며 다양하다. 그의 사고가 때로는 SF보다 더 혁신적이고 과감하여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노화백의 말에는 진정성과 정연한 논리가 배어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접고 용인의 교외에 칩거하면서 이 엄청난 작업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예기』의 ‘이군삭거(離群索居)’란 말 그대로이다. 이런 큰 뜻이 있었기에 만몽재에 칩거하면서 우직하게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갈 수 있었으리라. 열정과 소신은 결코 나이를 먹지 않는다. 넌지시 건강 비결과 향후 계획을 물었다.
“이 나이 때의 질환을 다 앓고 있어요. 우선 먹는 것부터 자꾸 제약이 많아져요. 삽화와 글쓰기 작업을 하고 나면 머리로 열꽃이 올라와요. 특별한 건강비결은 없고 맥주 마시면서 그냥 쉬는 게 다지 뭐. 내가 올해 일흔 다섯인데, 앞으로 판단력이나 체력은 십년이 한계일 것으로 봐요. 이제 십년짜리 인생인데, 남은 여생동안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젊은이들에게 우리 역사를 일깨워주고 큰 꿈을 심어주고 싶어요.”
공연히 바지런한 만추의 산 그림자가 어느새 만몽재의 턱 밑까지 내려와 방문객의 발길을 재촉한다. 흘러가는 시간과 세월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마는 때로는 청춘의 새 봄보다 황혼의 가을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법! 문득 옛 시인의 절창 한 구가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서리 맞은 가을 단풍이 이월의 꽃보다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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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님2022-04-21 19:20:32

    어려서 라이파이를 읽으며 자랐습니다. 지금까지 살아계셔주서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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