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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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예술인 열전] 한국의 정서를 세계음악으로 디자인하다
2층 작업실에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
한국의 정서를 세계음악으로 디자인하다
글·사진 박노훈 기호일보 기자
‘이 강산에 정기가 / 한 곳에 모여 /
그림같이 아름다운 / 수원 내 고향 /
이끼 푸른 옛 성에 / 역사도 깊어 /
어딜 가나 그윽한 / 고적의 향기 / (중략) /
(후렴) 수원 우리 수원 / 정든 내 고향 수원 /
날로 달로 융성하는 / 복지가 여기다’
이흥렬(1909~1980) 선생이 작곡한 ‘수원의 노래’ 일부이다. 지난 3월, 수원SK아트리움(수원시 장안구 정자동) 개관식에 앞서 대공연장 로비에서는 ‘수원의 노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노래비는 이흥렬 선생의 사진과 함께 이 선생의 아들인 이영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이 수원시에 기증한 ‘수원의 노래’ 원본 악보를 동판으로 떠 제작됐다. 국가도 아닌, 한 지역을 향한 노래. 그것도 조선시대 제2의 수도였던 수원을 모티브로 근대에 만들어진 노래. 그렇다면 ‘수원의 노래’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이영조 이사장을 만나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변은 수원화성국제음악제에서 ‘여명’을 연주한 헝가리 교향악단의 일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알 수 있다. 꽹과리를 처음 접했을 헝가리 교향악단 연주자가 한 시간 만에 그 꽹과리를 마스터했다는 것. 즉, 꽹과리로 국악을 연주한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악기 중 하나로 소화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음악적 철학과 이 이사장의 표현대로 ‘노골적으로 삽입한 수원의 노래’가 결합돼 수원과 한국적 정서가 담긴 오케스트라 곡이 탄생한 것이다. ‘여명’ 작곡 동안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달라는 말에 한숨부터 내쉬는 그. 통상 작곡가들이 오케스트라 규모의 곡을 쓰거나 의뢰를 받을 때 최소 6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석 달 만에 곡을 완성했다.
“원래 몸무게가 70㎏대 중반이었는데, 그때는 65㎏까지 살이 빠졌어요. 하루 12시간은 앉아서 곡을 쓴 것 같아요. 작곡 스타일이 구상을 오래하고 곡을 쓸 때는 집중적으로 쓰는 식인데, 아내가 고생 많았죠. 끼니도 2층 작업실로 배달(?)해 주고, 한참 예민해질 때라 아마 눈치도 봤을 겁니다”
결국, 평소 확고한 음악 철학이 있기 때문에 고생스럽지만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작곡가 이영조를 말하다
작곡가 이영조(72)는 3대를 잇는 음악 가정에서 태어났다. ‘진짜사나이’, ‘코스모스를 노래함’, ‘섬집아기’, ‘어머님의 마음’ 등의 작품을 남긴 부친 故 이흥렬은 그에게 어려서부터 음악의 기초 이론을 가르쳤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나운영 교수를 사사, 졸업 후 독일 뮌헨 국립음대(Hochschule fur Musik in Munchen) 최고위 과정에서 세계적 거장 칼 오르프(Carl Orff)와 빌헬름 킬마이어(Wilhelm Killmayer)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연세대 교수가 됐고, 그 후 다시 미국 시카고로 유학 가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10여 년을 지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초청으로 귀국 후 음악원장, 국립한국예술영재교육원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교육 때문에 강한 독일적 논리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유럽적으로 곡을 쓰면서 한국의 전통 소재를 현대화시켜 오늘날의 국제 음악 언어와 접목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로로 한국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화관 문화 훈장을 수여했고(2013), 그 밖에 최고 예술가 음악 부분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회 1998), 한국작곡대상(오페라 황진이·한국 작곡가회가 2002), 한국작곡대상(한국비평가협회 2006)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인터뷰 내내 세계 음악 속에 한국적인 것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말미에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중 하나가 무용수가 몸짓 언어를 표현하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곧바로 이를 선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대체해 봤다.
“몸동작을 선으로 표현하니 같은 동작인데도 현대의 디자인 같지 않느냐. 내가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변질’이 아니라 성장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유의 정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서를 현대적으로, 세계 음악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곡가의 첫 번째 비평가는 연주자다. 나의 이러한 시도에 과거에는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 곡을 찾는 연주자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건 이런 내 철학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 같다”
결국, 그는 한국의 정서를 세계 음악으로 디자인하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작곡가인 셈이다.
박노훈은 기자가 천직은 아니지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라 믿고 10년 넘게 기자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경기와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기호일보에 입사해 경제와 문화 분야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