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호 [수원 옛사진 이야기] 사진으로 읽는 수원의 근대풍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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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대문- 제물포에서 서울 가는 길’로 잘못 표기된 팔달문


[수원 옛사진 이야기]

사진으로 읽는 수원의 근대풍경(1)



글 한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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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목 돈대 어재연 장군 지휘소를 점령한 미군들(1871)

근대, 사진을 만나다

근대의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가 사진이다. 사진의 매력적인 역할과 기능은 대상을 순식간에 복제하는 속도와 더불어 숙련된 화가에 의해 오랫동안 그렸던 값비싼 초상화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에 사진과 사진기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890년대 이후의 일이지만 서구인들이 한국을 사진에 담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미 1871년 신미양요(조미전쟁) 당시 미 해병대를 따라온 사진작가에 의해 찍은 전투 관련 사진이 한국을 직접 찍은 최초의 사진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인으로 사진기를 접하고 사진을 찍은, 정확히는 사진이 찍힌 사례는 이보다 앞선 일이다. 1863년(철종 14) 1월 29일(음력) 중국 북경의 러시아 공사관에서 러시아 사진사가 이항억(李恒億)을 비롯하여 박명홍·오상준 등 조선의 연행사 일행을 찍었다. 이는 현재까지 한국인을 모델로 찍은 최초의 사진이라 할 수 있다. 동지 겸 사은사 이의익(李宜翼)과 부사 박영보(朴永輔), 서장관 이재문(李在聞)을 따라 북경을 다녀온 수행원 이항억은 『연행일기(燕行日記)』에서 사진을 찍은 사실을 남기고 있다. 사진 속 일행16명은 각자 아주 자연스럽고 풍부한 표정을 짓고 있어 인상적이다. 사진을 찍은 며칠 뒤인 2월 3일 러시아 공사관에 찾아가 사진을 보았던 그들은 개인 사진 1장에 은 수십 냥 가격에 혀를 내두르며 외국인들의 상술에 놀라고 있다. 끝내 이항억은 사진을 구해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사진은 왕실에도 소개되어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왕족 및 대신들은 사진을 자주 찍었다. 그러나 상당수 관리의 사진들은 정확한 신상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조선풍속·풍경사진집에 실려 있는 사진들도 있다. 이는 189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판매하는 사진상(寫眞商)들이 출현하였지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무렵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의 체험기, 여행기에는 사진상에게 구입한 사진이 중복 수록된 사진들이 상당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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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러시아 공사관에서 찍은 사진(1863).

수원을 찍은 최초의 사진들 - 잘못된 정보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서양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해가 우호적으로 변화되었다. 1894년 2월부터 4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Bishop, Isabella Bird,1831~1904)은 1897년 1월 영구 귀국하였다. 그녀의 저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비롯한 초기의 한국을 알리는 대표적인 저작물들에 수원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거나 찍은 사진은 없다.
사진이 전래된 이래 수원을 찾은 사람들은 수원 화성의 유려함에 감탄하곤 한다. 이는 이미 화성 축성 당시부터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으로 질시와 찬미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시인묵객들의 찬탄의 대상이었다. 1909년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1원짜리 지폐의 표지 모델이 화홍문이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기 관료들에게도 화성의 아름다움은 익히 알려진 자랑스러운 문화 유 산이었다.



현존하는 수원 최초의 사진은 팔달문이다. 프랑스에서 제작한 사진엽서의 형태로 남아있는 팔달문 사진이다. 그러나 설명문은 ‘서울·남문- 제물포에서 서울 가는 길’로 잘못 달려 있다.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이후 엽서로 만든 것이다.
서울 남대문만큼이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수원의 남대문이 팔달문이다. 서울의 숭례문과 수원의 팔달문은 한자로 걸린 현판으로 하여 틀릴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서양인들이 한자를 모르는 무지에서 온 결과였다. 세로로 걸린 숭례문 현판과 가로로 걸린 팔달문 현판의 차이를 조선의 식자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오류는 까를로 제로티(Carlo Rossetii)의 책 『Corea e Coreani』 1904)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1902년 10월 한국 영사로 근무 명령을 받은 이탈리아 대위 까를로 제로티는 1903년 7월까지 서울에 체류하면서 동료인 사진 전문가 가리아쪼(P.A Gariazzo)와 함께 서울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이들의 사진은 생동감 넘치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들로 상대적으로 문화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Corea e Coreani』(1904)의 로제티 책은 이태진 교수가 영국에서 발견하여 서울학연구소에 제공한 것으로 서울학연구소에서 『꼬레아, 꼬레아니』라는 이름으로 1996년 번역하여 발간하였다. 이 책에는 수원 관련사진이 1장 실려 있는데, 「한국의 형벌」이라는 장에 어떤 맥락도 없이 팔달문이 실려 있다. 이 책에서 유일한 수원 관련 사진임에도 사진 설명은 더욱 엉뚱하게도 ‘서울-서소문’으로 잘못 달려 있다. 그는 아마도 서울 사진으로 알고 책자에 실었겠지만 팔달문 현판과 더불어 남옹성 및 옹성문이 잘 남아 있는 팔달문 사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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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소문’으로 오기된 팔달문

이 책에 실려 있는 팔달문 사진은 로제티가 직접 찍은 것이 아니다.
350여 장의 사진들은 로제티 일행이 직접 찍은 사진들과 다른 사람이 촬영한 사진을 재복사하거나 서울 무라카미(村上) 사진소에서 구입한 사진들이다. 이미 1890년대에 사진술을 배운 사람들, 특히 일본인들이 사진을 파는 사진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00년대 초 서울에는 무라카미사진소가 있어서 상당한 사진을 확보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판매하였다.
또한 그 밖의 삽화들은 스미스(J. K. Smith)와 전 서울 주재영국 부영사 오르나티(L. Ornati) 해군대위, 서울에 잠시 머물렀던 전 함대사령관 레가지오네(R. Legazione)와 로제티의 비서이자 수석 조타수였던 파로디(Parodi)의 사진을 수록한 것임을 부기하고 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사진기를 갖추어 여행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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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원 서문’으로 잘못 오기된 남암문. / (우)화산의 정조대왕릉(건릉)으로 오기된 사도세자의 융릉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성곽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도시들의 외형도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통감부를 정점으로 전국을 몇 구역으로 한 이사청(理事聽)을 두어 식민통치의 기반을 만들어 나갈 때 도로와 철도부설 등의 명목으로 성벽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대구를 비롯하여 서울, 전주 등의 성곽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경우 사람과 자동차의 원활한 왕래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1908년 숭례문의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현재 화성에서 미복원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남공심돈과 남암문이다. 일한서방(日韓書房)에서 발행한 『한국사진첩』(1910)에는 귀중한 남암문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러나 설명 캡션은 ‘수원 서문(水原西門)’으로 잘못 달려 있다. 그럼에도 남암문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인들이 제작 판매한 사진엽서 가운데 정조의 건릉과 사도세자의 융릉을 착각하여 제목을 잘못 단 것이 있다. 이는 정조의 현륭원 천봉 과정과 현륭원이 파주에 있는 인조의 장릉(長陵)을 모방하여 건축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일본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만들면서 세조의 명을 어기고 병풍석을 두른 정조의 가슴 가득한 아픔을 기억할 일이다. 세조의 광릉 이후 왕릉은 병풍석을 쓰지 않고 난간석만 두르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도 가끔 융릉과 건릉의 사진을 잘못 쓰는 경우가 있다.



한동민(문학박사) 학예팀장은 옛 수원 땅인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 출생이다. 3.1운동의 격렬한 항쟁지였던 고향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으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과 근대불교사로 중앙대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수원시사편찬에 관여하면서 수원지역사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현재 수원박물관 학예팀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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