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호 [특집 3] 청년 문화의 종말과 다종다양 문화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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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

청년 문화의 종말과 다종다양 문화생태계



글 신현아 來人 commer, 문화평론가



시대를 선도하는 자, 그 이름 청년



청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청년은 말 그대로 푸르고 젊은 시기이면서 대학의 자유로운 공기나 연애, 치기어린 열정, 문학청년, 정의에 불타는 혈기 등을 환기시킨다.
한국에서 이러한 ‘청년’의 개념이 생겨난 것은 약 백 년 전의 일이다. 때는 1900년대 초, 당시 조선은 근대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과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격변의 시기에 시대의 선봉에 설 것을 요청받은 것이 바로 ‘청년’이었다.



‘청년’이라는 말은 1900년대 초에 youth나 young men과 같은 단어의 번역어로써 등장했다. (『문학청년의 탄생』, 소영현,푸른역사, 2008.) 그런데 ‘청년’이라 번역을 하기는 하였으나 이때까지의 조선에는 대체 무엇이 ‘청년’인지 그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아이가 상투를 틀면 바로 어른이 되는 전근대의 세계였으니, 청년은 아이와 어른의 사이를 비집고 탄생한 개념이었다. 그러니 ‘청년’은 자연히 기존의 봉건적 세계와는 결별하여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새로운 근대적 주체라는 위치를 할당받아 등장하게 된 것이다.
청년들이 이렇게 새로운 세상의 지도를 그릴 때, 지도가 실질적인 효과를 낳도록 하는 제도술 중 하나가 ‘소설’이었다. 근대적 소설은 현실의 세계를 핍진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기존 봉건적 ‘구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독서-묵독, 화자-인칭, 독자 등을 불러내었다. 봉건적 세계와 결별하고 근대적 세계를 구상해야만 했던 청년들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재구성할 수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자유연애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적 아비가 짝지워준 관계에서 벗어나 근대적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다른 개인과 관계 맺는 것, 그것이 모름지기 신시대의 청년이 해야만 할 것이었다. 동경 유학생이자 대표적 신-청년인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에서 영채는 아비가 어릴적에 짝지워준 형식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이 태어나고, 형식과 선형의 자유연애가 그려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청년-소설-자유연애-새로운 세계라는 연쇄가 작용하고 있는것이다.
‘청년’이 놓여있는 이 근대적 연쇄는 이후 백여 년에 걸쳐서 이어져왔다. 이 청년들이 기성세대가 되면 다시 새로운 청년들이 나타나서 기성세대의 문화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의 선편을 잡을 것을 요청받는다. 그렇게 청년들은 학생운동으로, 민주화로, 포크음악으로 새 시대를 부르짖는다.



청년이여, 안녕!



하지만 이 ‘청년’은 사실상 어디까지나 이성애자-남성-엘리트의 몫이다. 『무정』에서 여성인 영채가 청년이 되기에 적합한 자가 되는 것은 사실상 남성 엘리트인 형식과의 위계 속에서 결정된다. (김효진, 김영민, 「계몽 운동 주체의 변화와 “청년”의 구상」, 2009.) 이후 한국의 ‘학생운동’과 ‘민주화’의 중심이자 적자임을 자처하는 것 역시 386 남성 엘리트였다. 포크도 청년문화도 사실상 남성-대학생(엘리트)이 ‘선도’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때, ‘공순이’들은 라디오를 켜고 그 음악을 따라흥얼거렸다. 그 흥얼거림은 ‘청년’의 역사 안에 기록되어있지않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찬란하게 시작되었던 ‘청년’의 역사는 지금 사실상 막을 내리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청년’은 더 이상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나갈 주체로 호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구제대상이다.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힐링 산업이 그것을 증명한다. 갖가지 토크 콘서트, 청춘 콘서트, 청년 멘토 등 힐링 산업속에서의 ‘청년’은 선도하는 자나 전위가 아니라 환자에 가까워 보인다.
한때 청년들이 새로운 세계를 그리는 제도술이었던 근대 소설에서도 파열음이 들려온다. 젊은 독자들은 점점 한국 ‘순수문학’을 읽지 않게 되었고, ‘순수 문학’이라는 위계를 중심으로 하여 문학청년들의 아비 계승 서사를 이어왔던 ‘문학장’도 이제 그것을 계승할 ‘청년’이 없어 게토화되어간다.
연애 역시도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의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 ‘비혼’ 등은 이제 너무 흔한 말이 되었다. 연애도 혁명도 하지 않는 이젊은 세대를 두고 기성세대들은 걱정이 많다. 20대가 투표를 하지 않아서 나라가 이 꼴이라고 책임전가를 하거나, 어떻게 하면 결혼율과 출산율을 늘릴지 각종 대안을 제시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어서 ‘청년’이 되어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실 간단한 문제이다. 역사적 ‘청년’의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청년과 함께 근대적 연쇄 고리를 이루던 ‘순수 문학’, ‘연애-결혼-출산’, ‘운동’도 끝이 나고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납득해야 한다. 동시에 청년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음을 본다. 남성-엘리트가 전위로서 앞서서 나가니 남은 자가 따르며 새 시대로 행진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불가능해지자 ‘청년’을 중심으로 했던 연쇄 속에 포함되지 못했던 것들이 여기저기서 무성하게 싹을 틔워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다종다양 생태계



지금의 새로운 생태계에서는 아이돌 팬픽, Boy’s Love, Girl’s Love 같은 소녀 문화나 만화·애니메이션·동인지·피규어 수집 등의 오타쿠 문화, 무협·판타지·로맨스와 같은 장르소설, 자유로운 플랫폼의 웹소설, 그리고 남녀노소에게 메이저한 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웹툰 등이 ‘공존’한다. 이전에는 ‘순수 문학’과 ‘서브컬쳐’와 같은 위계의 구분이 있었다면 이 문화들은 하나가 주도적인 ‘청년문화’로 자리잡지 않되, 각자의 취향으로서 존중받으면서(이를 ‘취존’이라 한다) 같은 무게로 공존하는 것이다. 하여 이 다종다양한 생태계에서는 기존의 ‘문학장’이나 ‘청년문화’의 안에서는 언제까지나 소수자였던 주체들이 보다 쉽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청년’에 대비되는 감상적이고 연약하고 순수한 독자로서의 ‘문학소녀’는 아이돌 팬픽을 즐기는 지금의 ‘빠순이’에게는 당치 않은 것이다.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간의 연애를 상상하며 쓰는 팬픽은 팬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고, 성애적인 내용도 거침없이 다룬다. 그러다 인기를 얻게 되면 작가가 직접 인쇄소에서 출간을 하여 판매를 하기도 한다. 이제 소녀는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이며, 이 생태계 속의 당당한 주체이다.
웹소설의 생태계도 흥미롭다. 웹툰의 경우 일반 투고란에서 연재를 하다 웹툰 플랫폼과 정식으로 계약을 하게 되면 프로작가가 되는 일종의 ‘등단’ 과정을 여전히 거친는데 반해, 웹소설은 훨씬 자유롭다. ‘조아라(http://www.joara.com/)’라는 유명 웹소설 사이트를 보자. 간단한 가입 절차만 거치면 글을읽을 수도 있고 자신의 작품을 업로드 할 수도 있다. 인기 작가들은 유료 결제나 정식 출간을 통해 전업 작가가 되기도 한다. 또 서평 코너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작품에 대한 평가나 토론이 자유롭게 오고간다. 누구나 자기만의 지면을 갖고, 그것을 업으로 삼을 수도 있으며, 작가와 독자가 거리를 두지 않는 비평의 장이 함께 연동되는 이 구조는 지금까지 ‘문학’이 그토록 이론적으로 요청했으나 실패한 것이기도 하다.퀴어도 이 다종다양한 생태계 내에서는 마냥 ‘소수자’이거나터부시되는 존재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조아라나 웹툰 플랫폼인 레진 코믹스(http://www.lezhin.com/) 등의 사이트에서 이성애 로맨스는 BL(Boy’s Love), 백합(Girl’s Love), TS(성전환물) 등과 같이 그저 수많은 장르 중 하나일 뿐으로 ‘정상성’이나 ‘비정상성’과 같은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장르들은 일종의 판타지로서 현실의 퀴어와 바로 등치되지는않는다.)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들의 생태계를 여기저기에 만들어내는 이 구조에서는 주체들 간의 결속 방식 역시 바뀌게 된다. 결혼 ‘못’한 미혼을 결혼 ‘안’하는 비혼으로 바꾸어가는 것이나, 만화·애니메이션 속 인물에게 절절한 애정을 쏟는 오타쿠,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살아가는 ‘쉐어하우스’나 동거 등은 더 이상 ‘이상한 것’이나 ‘문란한 것’이 아니다. 단지 연애-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재생산’이 청년의 책무이던 시대가 끝나고 나타나는 새로운 결속 방식일 뿐이다. 그러니 젊은 세대가 단지 사회복지의 부재나 빈곤을 이유로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다는 접근은 일면적이다.
이렇게 ‘청년 문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하위’에 있는 문화라고만 여겨졌던 다양한 생태계와 주체들이 새로운 공존의 문화생태계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물론 여전히 청년, 청년문화, 문학을 수호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대체 저런 것들이 과거의 청년문화와 같은 정치적이고 저항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묻곤 한다. 그럴 때에는 이제 당신이 생각하는 저항과 정치가 끝났을 뿐이라고 대답해주자. 내가 그 정치의 중심이라고 자임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정치적인 주체가 되고, 이전에는 저항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이 저항으로 떠오르고 있다.
남성들의 청년 문화에서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이생태계의 변화와 함께 어느 때보다도 크게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며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새롭게 열리는 이 다종다양한 문화 생태계에서, 청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반갑게 만나자.



신현아 연구모임 아프꼼의 來人커머로 활동하고 있고, 동아대학교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공저)를 함께 썼다. 청년과 문학장의 관계나 서브컬쳐에 관심을 갖고 있고, 앞으로는 포스트 휴먼과소녀 주체의 관계를 연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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