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호 [특집 1] '위험'한 청년을 기다리며


[특집 1]

'위험'한 청년을 기다리며



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중앙대 교수 그림 헤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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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靑春)의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푸른 봄’이다. 자주 쓰이지는 않으나 청춘과유사한 단어인 ‘방세’(芳歲) 역시 ‘꽃 같은 세월’이라는 뜻이다. 청춘이 ‘봄’이나 ‘꽃’의 이미지를 가진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봄은 겨울에 한시적으로 죽어있던 생명이 새롭게 탄생하는 계절이다. 영어의‘spring’도 동일하게 재생, 부활, 시작 등 을 의미한다. 당연히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청춘의 봄은 타나토스가 아닌 에로스의 시절이다. 강렬한 생의 에너지를 터뜨리며 사랑의 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에로스의 서사가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삼는것은 이 때문이다.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성춘향과 이몽룡은 16세(이팔청춘)였고,집안의 반대를 넘어 서로를 갈구했던 줄리엣과 로미오는 각각 13세, 15세 언저리였다.



문학평론가 노스럽 프라이는 『비평의 해부』라는 책에서 사계절을 통해 신화의 원형비평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 중 봄의 신화를 담고 있는 문학형식을 ‘희극’(comedy)에서찾는다. 프라이에 따르면, 희극의 전형적 서사는 이런 것이다.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원한다. 하지만 그의 욕망은 이에 반대하는 장애물에 막힌다. 여러 갈등과 반전 후에 플롯의 끝부분에서 젊은 남자는 젊은 여자와의 사랑을 이룬다.’ 젊은 남녀의 사랑을 막는 장애물로 흔히 등장하는 인물은 아버지 혹은 나이 든 남자다. 여기서 아버지와 나이 든 남자 등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표상한다. 이들은 모두 젊은 남녀가 갖지 못한 상징인 자산(권위, 명예, 지혜)이나 물질자산(돈, 나이)을 가졌다.
젊은 남녀는 가진 것이 없지만 오직 젊은 에너지의 힘으로 이들의 노회함과 간교함을 끌어내고 결국 자신의 욕망을 성취한다. 새로운 세상을 욕망하는 질서가 기존의 세상을 방어하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희극은 어떤 전복성을 가진다.” 불가피한 운명 앞에서 파국을 기다리는 ‘비극’(가을의 신화)에 반해 봄의 신화인 희극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다시, 시작과 탄생이라는 청춘/봄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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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서사

청춘의 서사가 반항하고 전복하고 혁명을 기도하는 이들로이루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유대교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급진적 설교를 했던 예수, 당대의 체제 전체를 비판하며 혁명적 꼬뮌을 만들었던 성직자 토마스 뮌처, 『공산당 선언』을 통해 지금까지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다시 썼던 맑스와 엥겔스는 모두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현재의 세상을 있게 한 것은 저 옛날 청년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질서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질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청년들은 그래서 고뇌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비텐베르그 대학의 휴학생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어긋난 시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존재를 건 고민에 빠지고 『햄릿』, 17세의 고등학생 홀든 콜필드는 세상의 모든 위선과거짓을 혐오하여 학교를 나오며 『호밀밭의 파수꾼』, 대학생 영훈은 절망과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쉬운 타협 대신 정처 없이 방황하기를 택한다 『젊은 날의 초상』. 이러한 방황이 때로 죽음과 파멸로 끝난다 해도, 자신이 욕망했던 새로운 질서의 싹은 이미 뿌려져 있다.
청년의 비상과 몰락을 서사화하는 대표적인 소설은 F. 스콧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다. 주인공 개츠비는 서른 초반의 청년으로, 이십대 중반에 잠시 사랑에 빠졌던 데이지를 잊지 못해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설을 ‘로맨틱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갈망은 ‘사랑’으로만 끝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은 개츠비에게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거대한 확신’의 일부일 뿐이다. 다시 말해, 개츠비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계발하고 단련하여 초라하고 소박한 부모와는 다른 사람이 되려는 꿈을 가졌고, 후에 가출을 하고 자신을 뒤바꿔줄 계기들을 만남으로써 진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부잣집 딸인 데이지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된 개츠비가 이루지 못한 단 하나의 결점이었고, 개츠비는 그 결점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개츠비가 ‘위대’하다면, 그 이유는 그가 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바꾸겠다는 꿈과 이상과 갈망을 죽을 때까지 믿고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속물들이 넘쳐나던 1920년대 미국사회에서 개츠비는 그런 ‘순수한’ 청년의 꿈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춘의 서사’라는 이름은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청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많은 서사들에는 어렴풋한 패턴이 있다. 그런 서사들에서 청년들은 기존의 질서를 어떻게든 넘어서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고 싶어 한다. 때로는 햄릿처럼 고뇌하고, 때로 는 줄리앙 소렐처럼 성공만을 지향하며(『적과 흑』), 때로는 주드처럼 자신만의 길을 고수하려 하지만(『무명의 주드』), 결국 방법은 달라도 공히 개츠비가 그렇듯, 지금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창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위험한 계급



고전 문학에 아로새겨진 청춘의 서사들과는 달리 우리 시대한국의 청춘으로 돌아오면 그곳에 ‘푸른 봄’은 이미 없는 듯하다. ‘청년’을 수식하는 단어의 계열에는 대개 ‘백수’, ‘실업’ 등만남았고, ‘3포 세대’로 시작되어 ‘7포 세대’로까지 이어지는 청년들 스스로의 자기호명은 ‘헬조선’이라 불리는 현실의 지난함을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의 청춘들에게는 ‘부재’(‘실업’, ‘백수’, ‘7포 세대’)만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 고전 문학에서의 청년 주인공들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려 한다면,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창조’란 오직 ‘자소설’이라는 냉소적 이름으로불리는 ‘자기소개서’(자소서)에서의 과장된 글귀 외에는 없어보인다.
그런 청춘에 미안했는지 미디어는 ‘성공’도 하고 ‘개념’도 있는 이들을 불러다 ‘멘토’라는 호칭을 달아주고는 청년에 대한‘힐링’ 특강을 맡긴다. 이 소위 ‘멘토’들의 ‘힐링’ 특강은 청년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청년들을 힘들게 만든 시스템의 문제를 오직개인 의지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써 청년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주범들이다. 어쩌면 오늘날 미디어는자본주의 경제가 사람들을 고루 행복하게 만드는 데 실패했음을 가리면서 자본주의 경제의 판타지를 유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기실 오늘날 한국의 청년들이 이토록 무력해진 이유는 자기들 스스로에게 있지 않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있는 청년세대가 이제는 거의 상시적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경제의 고용부진 상태를 만나 ‘부재’의 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문제는 청년을 루저로 만든 오늘날의 경제 시스템에, 그리고이러한 시스템을 온존시키는 정치에 있다. 중요한 것은 청년들이 이를 인식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러한 경제-정치의 질서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프랑스 전역에서 계속되는 노동법 개악 반대 시위처럼 아예 광장을 점령하고 대규모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할 테고, 또 직접적인 저항은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경제와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적 공부를 나름대로 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청춘의서사’ 속에 등장하는 문학 속의 청년들이 그러하듯, 청년은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질서를 타고 넘어야 하고, 기존의 자신을 뛰어 넘으려 할 때 비로소 ‘청년’의 값어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청년들이 자신들을 ‘부재’로만 정의하고 그저 ‘헬조선’이라는 냉소만을 내뱉으면서, 여전히 스펙을 쌓고 멘토를 찾고 취업에 목을 맨다면, 청년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질서를 유하는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게 될 것이다. 권위에 감동하고 틀 속에서 경쟁하며 자기 몫을 챙기는 청년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위험하지 않은 청년들을 기존 질서가 두려워할리 없으며, 오히려 질서는 그 청년들을 소모품으로 이용하는데만 급급해할 뿐이다. 70년대와 80년대의 대학생들은 기존질서와 정면 대치함으로써 자신들을 대안적 질서를 만들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이들은 ‘위험’했기 때문에 폭력적 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실제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되었다. 오늘날 전혀 위험하지 않은 청년들은 연예프로그램에서의 방청객이 되거나 대기업의 소모품 인턴이됨으로써 기존 질서를 온존시킨다. 역사라는 이름의 노인은이렇게 청춘의 에너지를 체제유지의 원료로 삼으며 병든 삶을연장해간다.
이 황홀한 매트릭스를 벗어나 황량한 실재의 사막을 보기위한 ‘붉은 약’이 절실하다. 그 붉은 약은 지혜롭고 착한 멘토를 죽이고, 틀에 갇힌 경쟁의 논리를 거부하며,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급진성을 통해서만 오로지 만들어질 수 있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가치가 없는 봄은 그저차이 없는 반복이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그것은 이미 죽음과 소멸을 기다리는 가을이다. 청년은 봄이고, 봄은 창조고 도약이며, 창조와 도약은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헬조선의 청년은 위험한 계급(dangerous class)이 되어야 하며, 오직 그럴 때 ‘헬조선’은 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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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위스콘신대학교(밀워키) 영문학 박사로, 현재 중앙대와 한예종에서 영문학과 문화이론을 강의하면서,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한다.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경향성을 파악하고,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감각의 제국』, 『파국의 지형학』 등이, 역서로 『비평가의 임무』, 『광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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