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호 [책 나들이] 누가 이 시대를 노래할 수 있는가?


[책 나들이]

누가 이 시대를 노래할 수 있는가?



글 김희만 역사학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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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처, 『노래의 시대』

이 글의 지은이는 에필로그에서 “정신적 풍요보다 물질적풍요를 우선시하면서 우리 사회는 소득이 낮고 가난했던 때보다 더 불안하고 각박해졌다.
자본이 지배하는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위해 시간과 정열을 바치며 산다. 지나친 경쟁과 스트레스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회를 만들어냈고 우리는 고스란히 그 폐해 속을 허우적거리며 허기진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나면 정신적 행복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은 진정한 풍요를 위해 노래가 주는 기쁨과 유대할 시간”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해가 된다. 그래서 이글을 쓴다.



요즈음 각 방송사에서 ‘노래의 시대’를 연출하고 있다.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매료되고 청춘이 지난 과거의 ‘청춘맨(우먼)’들도 열광하면서 그야말로 노래를 벗 삼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열창하는 가수들과 그를 좇아 화려한 데뷔를 꿈꾸는 이 시대의 젊음이 그렇게 하루하루 저물어가고 있다.
과연 ‘이 시대를 노래할 수 있는가?’
지나간 시대의 노래들은 대부분 가사의 의미에 무게를 싣고, 가락과 곡조 또한 그 시대를 말해주는 문장이었음에 틀림없다. 즉, 가사의 뜻과 곡조가 어우러져 한 시대를 살아온 대중의 정서와 상상력을 보여주었으며 그 시대의 노고와 감동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특히 외국 민요는 우리에게 문화적 영향력을 미친 나라의 노래가 주를 이루었지만 낯설지 않았으며, 국적과 민족을 떠나 인류 공통의 요소를 담아내어 우리의 노래가 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속 시원하다.
이 책은 유행가에서 가곡, 동요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전 국민에게 널리 불리어지던 노래들을 고루 소개하고 있다. 대중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는 주로 사랑과 이별, 꿈과 이상, 추억과 그리움을 다루는 노래들이 주류이다.
이 책에서 노래한 레퍼토리는 크게 3장으로 이루어졌다.
낭만적인 시 구절을 떠올리는 제목으로 ‘사랑했던 그때 그 순간’, ‘산 위로 피어오르는 흰 구름’, ‘떠돌며 생각한다, 그대를’ 등이 가사책에 버젓이 소개되어 있다. 음식점의 메뉴판에서 색다른 음식이름을 보면 그 자체 흥미를 유발하듯이 이 책의 레퍼토리도 맛있는 요리의 대명사로 다가온다.
<고향의 봄>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부르는 동요로 1926년 이원수의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여 불렀던 노래다. 사실 1920년대는 창작 동요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로 이러한 현상은 아이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전혀 없던 척박한 현실에 대한 반성이었다. 1910년에서 1918년에 이르는 일제의 대규모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들은 급격하게 몰락하였고,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으로 농촌은 거의 황폐화되었다. 식민권력의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수탈 아래 먹고 살 길을 찾아 일본, 만주, 연해주 등으로 떠나는 이주민의 수는 거의 100만에 달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실의 정서는 시대상황과 민중의 현실을 직접 반영하는 것이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1936년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로 발매되었는데, 1930년대 어느 여름날 극단 예원좌가 두만강유역의 도문에서 공연을 마치고 숙소에 묵고 있을 때였다. 이들은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지만 밤새 옆방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울음소리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는데, 사연인즉, 독립군으로 출정한 남편의 소식을 수소문하러 강을 건너온 아내가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슬픔과 절망으로 오열하였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단순한 시대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처절한 망국의 한을 노래한 것이다.
해방 전후와 1950~1960년대에 나왔던 대중가요에는 마도로스와 항구를 소재로 하는 노래가 많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새로운 항구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멋쟁이 마도로스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항구마다 새로운 여성들과 만나 사랑하고이별하는 이야기들은 그 시대 남성들의 멋이고 풍류였다는 것이다.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노래방의 인기 차트에 올라가 있는데,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이기적 유전자』에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고 비유한 바, “그 정자는 수백만의 거대한 함대를 이루는 작은 배들 가운데 한 척이었고, 배들은 일제히 당신의 어머니 쪽으로 노를 저어 들어갔다. 이 특별한 정자는 당신 어머니의 난자 중 하나에 도달한 소형 선대 중 유일한 하나의 정자였다. 이것이 당신이 지금 존재하는 이유이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미자의 노래 <동백아가씨>는 1964년 당대 최고의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을 한 영화 <동백아가씨>를 위해 급조한 노래였다. 이 노래는 35주 동안 가요 베스트 1위를 차지하였는데, 1960년대는 6·25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농산물 원조로 끼니를 연명하던 비참한 시대에 <동백아가씨>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흔하고 신파적인 줄거리를 통해 전쟁의 후유증과 가난으로 한이 많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다.
흔히 1970년대 대중가요는 김민기의 <아침 이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이전까지 나왔던 트로트나 포크송 위주의 대중가요 양식을 확연하게 바꾸어놓았다. 상업적이고 상투적인 가사에서 창의적이고 진지한 가사로 진부하거나 평범한 멜로디에서 시적 이미지를 음악화한 서정적인 가곡 풍으로 리듬과 선율 양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침이슬>은 분명 말초적이고 소박한 수준에 머물고 있던 기존의 가요를 보다 지적이고 미학적인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1980년대는 대학생들이 기타를 치며 미래 전망이 불투명한 당시 정치 상황을 노출시키며 결연한 의지나 비장한 죽음같은 무거운 명제들을 환기시켰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김종찬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라는 노래가 88올림픽의 분위기를 타고 커다란 반응을 얻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직장이 토요일 오전 근무를 했다. 이의 반영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직장이 주5일 근무라 ‘불타는 금요일’이라는 새로운 유행어가 생겼다. 세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아파트는 1980년대 대중의 의식과 세계를 지배하는 키워드였다. 윤수일의 <아파트>는 당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최신의 노래이자 최고의 노래였다. 이 노래는 딩동! 하는 벨소리로 시작해서 콘크리트 회색빛 아파트를 고향으로 삼은 도시인의 감성을 보여준다. 또한 도시인의 영혼 없는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싸이의 노래 <강남 스타일>은 강남의 풍요로움을 배경으로 한다. 이 노래는 강남의 좀 놀 줄 아는 남녀를 보여준다. 논다는 것은 누릴 줄 안다는 말이다. 부모 세대가 축적해놓은 부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강남의 신세대들을 보여준다. 강남의 풍요로움은 아파트 개발에서 비롯되었다. 물질적 풍요 속의 정신적 빈곤을 <강남 스타일>은 노래한다.
쉽게 골라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노래는 열려 있는 소통의 장르이다. 빈부나 귀천과 상관없이 노래는 모든 이들에게 햇살처럼 골고루 혜택을 베풀어줄 수 있다. 슬픔과 괴로움, 갈등과 번민도 노래 속에 흘러갔다. 노래는 추억을 먹고산다.
노래는 아름다운 과거를 불러와 현재를 상기시킨다. 노래는 흩어져 있는 마음을 모으고 정화시킨다. 노래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의 순간마저도 빛나게 만든다. 그런 노래들이 지속되길 바란다. 서로 경쟁하는 노래가 아니라,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그런 노래가 필요하다.
‘이 시대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이 시대를 노래 할 수 있는가?’



김희만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사의 이해』, 『화랑세기를 다시 본다』 등의 공저서와 「수여선의 개통과 사회변화」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최근 인터넷신문 뉴스피크에 ‘헌책방의 인문학’이라는 코너를 마련하여 격주로 글을 연재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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