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호 [문화읽기] 로맨스라는 판타지,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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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읽기]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대한 小考

로맨스라는 판타지, 혹은



글 류수연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3포 세대와 연애서사



오늘의 2030 세대는 경제침체와 함께 역사상 그들의 부모보다 가난한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 휩싸여 있다. 3포 세대를 넘어 5포, 7포라고까지 언급되는 그들에게, 이미 연애는 가장 먼저 포기해야만 하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처럼 청춘남녀의 연애가 경제적 이유로 포기되고 있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디어 속에서 연애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는 오히려 확산되고 있다. 연애를 할 수 없는 시대에 그에 대한 담론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연애컨설턴트라는 직업이 등장하고, ‘모태솔로’와 ‘연애고자’라는 자조적인 비아냥거림이 일상적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연애가 불가능한 시대에 걸맞도록 이제 연애도 하나의 ‘스펙’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디어 속에서 넘쳐나는 연애서사는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의 반영물이다. TV드라마는 그 장르를 불문하고 연애라는 양념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네이버와 다음카카오의 애플리케이션에서 매일 연재되는 로맨스 관련 콘텐츠만 해도 100여 편을 훌쩍 뛰어넘는다. 하루하루의 삶에 치여 가장 먼저 연애를 포기한다는 청년들의 현실과는 달리, 대중적인 콘텐츠 속에서는 연애만이 인생 목표인 듯 달려가는 인물들이 홍수를 이룬다. 현실에서는 이미 ‘불능’이 선언되어버린 ‘남녀의 낭만적 사랑’이 판타지가 되어 넘실거리는 것이다.



가장 환상적인, 그래서 현실적인



2016년 전반기에 가장 ‘hot’한 콘텐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태양의 후예>일 것이다. 케이블TV의 약진과 스마트 폰 애플리케이션까지, 미디어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공중파 TV가 침체일로를 겪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공중파에서 야심차게 준비했던 많은 미니시리즈들이 흥행저조를 보이면서, TV드라마의 부진은 더 심각하였다. 따라서 마의 시청률 30%를 넘어선 것도 모자라 40%에 육박하는 애청자를 보유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인기와 그에 따른 열광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hot’이 결코 ‘new’의 의미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 콘텐츠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어느덧 낯설어져버린 그 무엇을 다루고 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익숙함이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김은숙 작가는 그의 실질적 데뷔작인 <파리의 연인>(2004)부터 <온에어>(2008), <시크릿 가든>(2010), <상속자들>(2013), <태양의 후예>(2016)까지 안방을 사로잡은 대표적인 히트작을 집필하였다. ‘로맨스’를 중점에 둔 만큼 남녀의 애정이 메인 스토리였지만, 김은숙 작가의 작품에는 그만의 독특한 공식이 있다.
그는 이미 한국드라마의 한 전형이 되어버린 판타지에 가까운 남녀의 사랑을 낭만적으로 담아낸다. 재벌과 일반인의 우연한 만남이라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가 김은숙만의 개연성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만남이 일상적 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자신의 일상적 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계층적인 차이에도 남녀가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필연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로맨스가 ‘판타지’임을 잊지 않는 것은 김은숙 작품이 가진 또 다른 미덕이기도 하다. 모든 스토리를 가상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시청자의 뭇매를 맞았던 <파리의 연인>의 결말은 다소 과도했지만, 남녀의 신체가 바뀌는 <시크릿 가든>의 판타지를 제외하더라도 김은숙의 작품 곳곳에는 두 남녀의 필연적 사랑을 엮어주는 환상적인 장치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하나의 판타지임을 은연중에 각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문일까? 김은숙의 로맨틱 코미디는 비현실적으로 극단에 놓인 남녀의 만남을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대단히 현실적인 연애를 담아내고 있다. 분명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다루고 있지만, 적어도 김은숙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녀들은 마냥 착하거나 수동적이지 않다. 백마 탄 왕자님들도 한없이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김은숙의 신데렐라들은 선하지만 까칠하고 자격지심에 가까운 자존심으로 자신을 갉아먹는다. 또한 왕자들은 어떠한가? 부유하지만 이기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들이다. 남녀 모두 경제적 조건만 다를 뿐, 어딘가 한군데씩은 비어있는 인물들인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자신의 상황을 속이거나 감추지않는다. 그 ‘cool’한 정직함이야말로 시청자들이 김은숙표 로맨스를 현실적이고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다.
그런데 <태양의 후예>는 김은숙 작가에게 부여된 이러한 익숙함을 충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비껴나간다. 과거의 익숙한 패턴을 반복했다면 이 작품에 따르는 이러한 열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절정이자 변주였던 전작 <상속자들>은 김은숙표 로맨스의 정점이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제 그 추락이 예감되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상속자들>은 가장 진부했고, 그 점이가장 매력적이었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태양의 후예>는 어느 정도는 예상가능하다고 여겼던 그 익숙함을 또 다른 각도로 비트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직도 그의 로맨스가 동시대의 위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위안이 우리에게 다가서는 방식이다.



사라져버린 것들의 회복, 혹은 또 다른 환상



누군가의 생명을 살려야 하는 의사와 누군가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 군인. 이 드라마틱한 대척점에 서 있는 두 남녀의 어긋난 인연을 ‘우르크’라는 가상의 분쟁 지역에서 운명적으로 마주하게 한 <태양의 후예>는 자칫 군국주의에 대한 예찬으로까지 오인될 만큼 파병군인과 파병지에서의 활동이 주를 이룬 작품이었다. 더구나 주인공 유시진 대위가 대변하는 파병군인으로서의 당위는 양날의 위험을 가진 것이었다.
‘평화를 지키는 전쟁’이라는 그의 말은 베트남 참전 당시 미국이 내세웠던 ‘평화를 위한 침략’이라는 슬로건의 다른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낡고 누추한 군국주의로화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말하는 ‘평화’가 권력이라는 괴물이 아닌 진짜 국가를 이루는 한명 한명의 개인들에 포커스를 두었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이 만난 순간, 유시진의 임무는 강모연의 삶을 지키는 것이 되고, 강모연의 삶 역시 유시진을 살리는 사명이 되어버린다. 자기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곧 자신과 사랑하는 이를 위한 ‘최선’이 된다는 것. 사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최고의 환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 국가가 뭔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국가야. 그게 무슨 뜻이냐면 너 같은 새끼도 위험에 처하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구해내는 게 국가라고. 군인인 나한테 국민의생명보다 우선하라고 국가가 준 임무는 없으니깐.”

더 나아가 지진으로 인해 붕괴된 발전소에서 인명구조보다 서류봉투에 더 집착하는(사실은 은닉한 다이아몬드) 관리소장에게 분노한 주인공 유시진의 대사는 이 드라마를 향한열광의 정체를 보여준다. 끊임없이 애국심을 강요받았지만,국가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라는 가면을 쓴 권력에게 늘 버림받아야 했던 지난 역사를 떠올려 보라. 최근 우리 사회를 절망하게 만든 세월호 사건도 가습기살균제 사건도 사실 권력이나 경제논리가 앞에서 국민의 안전이나 생명이 얼마나 헌신짝처럼 버려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현실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국민의 생명보다 우선하라고 국가가 준 임무는 없다.”는 주인공 유시진의 대사는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환상의 실체가 우리가 가져본 적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국가’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일종의 향수를 그려낸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가져본 적 없는 대상을 향한 것이다.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낭만적 사랑과 지구 끝에서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내는 헌신적인 국가.
가져본 적도 가질 수도 없기에 더 간절한 그 ‘무엇’이 오늘의 우리를 위안하고 있는 것이다.



류수연 197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고 있다. 2013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뷰파인더 위의 경성』, 평론으로 『통각의 회복, ‘이름’의 기원을 재구성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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