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호 [특집 1] 공동문화를 향해: 일상생활문화의 위기와 그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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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공동문화를 향해:

일상생활문화의 위기와 그 극복



글 김용규 문화평론가, 부산대 영문과 교수 그림 임은영



최근 문화이론에서 일상생활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문화는 일상적이다”라는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유명한 말처럼, 1960년대 영국에서 문화연구는 문화의 일상성, 혹은 대중의 일상생활문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까지 ‘문화’는 ‘교양’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교양은 소수만이 획득할 수 있는 상징자본이었고 대중은 교양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미흡하고 거칠고 저속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문화는 소수의 창조적 주체들이 만들어낸 추상적이고 세련된 고급문화를 의미했고, 대중은 그 문화에 의해 선도되어야 할 계도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엘리트적 태도가 우세했다. 여기서 대중은 엘리트 계급이 만든 문화적 산물을 수동적으로 내려 받는다는 점에서 문화생산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문화연구는 이런 현실에 맞서면서 등장했다. 문화연구는 대중을 문화적 주체로 세웠고 대중의 일상생활을 하나의 건강하고 전체적 삶으로, 그리고 그들의 의미 창조를 중요한 문화적 실천의 장으로 인식해간 결정적인 전환이었다. 결국 문화연구는 대중의 건강하고 건전한 삶이 문화의 근간이라는 대중의 일상문화적 실천에 대한 재평가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일상생활문화에 대한 관심에는 이런 현실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정도 함께 관여되어 있어 복잡해 보인다. 우선, 일상생활문화를 둘러싼 조건들이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 일상생활문화가 자신의 대립항으로 설정해왔던 창조적 소수 중심의 엘리트적이고 계몽적인 문화론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엘리트 계급의 문화 또한 계급적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취향의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상생활문화가 새롭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인간의 세계와 존재, 그리고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모든 영역에서 효율과 이윤을 좇는 자본주의적 교환관계가 침투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데 있다. 그 결과 일상생활문화 자체를 둘러싼 근본적 조건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문화비평가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인간개인의 존재와 삶, 거기에 기반을 제공해주었던 공동체, 나아가서 개인과 공동체를 안정적 좌표 속에 자리매김했던 시간과 공간처럼 그동안 장기적이고 견고한 것처럼 보이던 사회관계와 제도들이 모두 유동적이고 순간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죽음과 삶, 사랑과 미와 같이 지속적이거나 영구적인 것처럼 보이던 인간적 관념들조차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이런 현상을 ‘유동적 현대성’이라 명명한 바 있다. 사실 그가 말한 유동적 현대성이란 인간의 기본적 조건과 욕구조차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순환구조 속으로 편입된 세계의 특징이다.
이제 일상생활문화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처지에 놓이게되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자본화와 그 문화체제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체제 속에서 일상생활 문화의 위기는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일상생활문화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의 일상생활문화론이 갖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문화론은 이런 변화를 가장 급격하게 경험한 프랑스 지식인들에 의해 치열하게 제기되었다.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같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일상생활문화의 의미를 천착했던 것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이 자본주의화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붕괴되고 있다는 인식때문이었다. 전통시장이 대형 마트에 의해 대체되고, 골목이대로로 해체되며, 마을이 공동주택으로 바뀌는 등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개인을 둘러싼 생활 기반과 지역사회가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일상생활문화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기 드보르는 유명한 책인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이런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사회를 통렬히 고발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의 일상적 삶과 체험의 조건들을 소외시키고 추상화하는 스펙터클한 이미지가 횡행하고, 나아가서 이런 이미지들이 분리되고 추상화된 인간의 삶을 다시 허위적으로 통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스펙터클의 사회란 상품 세계와 스펙터클한 이미지가 개인의 여가와 일상생활, 나아가서 인간 존재와 그의 미세한 삶의 영역까지 속속들이 침투한 사회를 말한다.

한국사회 역시 이런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이런 경험을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신자유주의적 이윤 추구로 인해 생겨난 엄청난 빈부격차, 경쟁에서 탈락한 잉여적 존재의 양산, 사람들에게 안정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던 가족 및 지역공동체의 해체 등은 한국사회 에서 일상생활문화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특히 자신의 삶의 터전 자체를 잉여가치 생산의 기반으로 삼는, 즉 자신의 집을 개발과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삶의 방식은 공동체와 지역사회를 파괴와 해체로 몰아간다.

이런 삶의 방식이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되면 생활문화뿐만 아니라 문화 자체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문화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공동체와 지역사회 속에서 형성된다. 즉 문화는 개인이 아니라 개인들 간(지역사회와 공동체)의 상호작용이 낳은 감성적 결정체이자 개인들이 창조적으로 참여해 형성해가는 의미작용의 산물이다. 쉽게 말해, 문화는 대중의 ‘전체적’인 삶의 방식이자 그들의 삶의 감성적이고 생태적인 순환에 근거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생태적 순환의 고리들이 해체됨으로써 개인은 더 이상 공동체적 상호작용과 의미망 속에 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살과 폭력과 같은 사회문제들이 만연하게 된다.
자살과 폭력의 급증은 개인들에게 의미를 형성하게 해주던 공동체적 문화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상 신호라고 할수 있다.

최근 들어 일상생활문화가 다시 관심을 끄는 것은 일상생활문화 자체가 더 이상 대중의 건강하고 건전한 삶과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절박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한국사회의 문화 생태계 자체를 비극적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문화생태계란 인간의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며 실천적인 생활과 리듬에 근거하는 일상문화의 다양성에 근거한다.

하지만 자신의 터전을 자율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부와 가치의 재생산의 기반으로 삼아 개발과 재개발의 대상으로 삼는 생활방식이 중심이 될 때, 일상생활문화는 철저하게 자본화된 단일한 삶의 방식으로 축소된다. 대중의 풍부하고 건강한 일상생활문화는 여가와 소비문화로 축소되거나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우리사회의 방식에서 잘 볼 수 있다. 죽음은 죽은 자의 죽음을 다루는 문제이기에 앞서 죽은 자로 인해 생겨난 인간적 삶과 그 문화의 순환에 생긴 여백을 다시 연결하고 순환하게 만드는 공동체의 중요한 사회적 의례이다. 그런 점에서 장례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순환과 관련된 핵심기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가?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화되어가고 있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 또한 공동체적 의례가 아니라 영리를 위한 자본화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사실 개인화와 자본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개인의 삶을 매개해주던 공동체와 지역사회의 문화가 사라지면서 죽음이 고독한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볼 때, 한국사회의 일상생활문화는 반생태적이고 반공동체적인 형태를 띠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위기에 처해있지만 일상생활문화는 대중적 삶의 전체성과 공동문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화의 자본화에 맞서는 강력한 보루로 기능할 수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일상문화를 강조하면서 문화의 기능을 “단순한 물질적 진보, 혹은 지배적 사회의 단순한 사회적 확신에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으로써 특정한 공동체에서 생겨나는 삶의 질에 관한 문제들에 초점을 두려는 시도” 임을 역설한 바 있다. 나아가서 그는 대안으로서의 공동문화를 제안한다.
공동문화란 단순히 문화적 소수나 자본이 갖고 있는 문화의 확산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대중이 의미와 가치의 구성에 참여하는 조건을 창조하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을 창조해가는 공동문화는 대중적 참여의 형식을 가로막는 온갖 물질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한편, 민주주의적이고 의사소통적이며 문화적인 기나긴 혁명의 과정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달라진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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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사회에는 급격한 압축 성장 중심의 산업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일상생활문화에서 이용할 만한 문화적 자산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대중이 창조할 문화적 미래는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미래는 기존 공동체의 문화를 단순히 복원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새로운 공동문화를 창조하려는 대중의 참여와 의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공동체가 지나치게 지연적이고 폐쇄적이며 문화적으로도 협소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면, 광범위한 소통망에 기반을 둔 오늘날의 공동문화는 개방적이고 세계적이며 구성적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본의 식민화에서 탈피해 생활문화를 함께 할 대중이 능동적 주체로 참여하면서 일상문화의 생태적 흐름을 북돋우는 창조적 문화가 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미래는 바로 이런 공동문화의 창조에 달려 있을 것이다.



김용규 부산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있고, 지역사회와 한국사회의 문화적 변화에 관심이 많아 지역에서 발간되는 잡지 『오늘의 문예비평』 과 부산문화재단의 계간 『공감 그리고』 의 편집위원, 『교수신문』 의 기획위원을 지낸 바 있다. 저서로는 『문학에서 문화로: 1960년대 이후 영국 문학이론의 정치학』 , 『혼종문화론: 지구화 시대의 문화연구와 로컬의 문화적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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