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호 [화성의비밀] 장안문 현판글씨의 진실
장안문 현판글씨를 김종필이 썼다고?
글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조병규 도지사를 수행하여 국무총리 결재를 받기로 한 바로 전날 종이와 먹물을 준비한 담당자였던 이낙천 선생은 마침 강화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아침 일찍 수원으로 출근하여 도지사와 함께 서울로 가기로 한 계획은 그 전날 밤 내린 폭설로 인해 제때에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도청에서는 인계동 이낙천 선생 집으로 지필묵 등을 찾으러 갔으나 찾지 못한 채도지사 일행은 서울로 출발하였다. 강화도에서 택시를 타고 수원으로 돌아온 이낙천선생은 준비물을 챙겨 서울로 출발하려 했으나 이미 도지사가 결재를 끝내고 총리 집무실을 나온 뒤였다.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글씨 부탁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담당자였던 이낙천 선생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경징계를 받았다는 것이다. 1975년 연말의 일이다.
도지사가 쓰고 양근웅 선생이 개작해서 신응수 대목이 각하다
화성 복원공사 기공식은 1975년 6월 7일 개최되었고, 1단계 사업 구간은 북문인 장안문에서 팔달산 서장대까지였다.
1단계 사업의 핵심은 장안문 복원이었고, 장안문 복원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장안문 현판의 게첩(揭帖)이었다. 이에 일정이 급하게 된 장안문 현판 글씨 문제는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 대신 조병규 경기도지사가 쓰기로 했다. 1973년 1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제15대 경기도지사로 재직한 조병규(趙炳奎, 1923~2004)는 경남 사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진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인물이다. 어린시절 한학을 공부하고 붓글씨를 배운 경험으로 장안문 현판 글씨를 쓰게 되었으니, 공식적으로 장안문 현판 글씨는 조병규 도지사의 글씨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글씨가 작고 필획에 문제가 있어 당시 경기도청에 근무하던 필경사였던 양근웅 선생이 개작을 하게 되었다. 소형(素馨) 양근웅(梁瑾雄, 1935~2001)은 진주농고와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진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결혼 직후 서울로 올라와 농협중앙회 · 법무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진주농고 선배인 조병규 도지사의 요청으로 경기도청에 필경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필경사는 등사판 또는 종이 위에 글씨를 써서 인쇄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으로 예전에 관청이나 학교 등 인쇄물이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있었던 사람이다. 양근웅 선생은 경기도청 필경사를 거쳐 수원시 사무관으로 진급하여 근무하다가 과천시청에서 퇴직하였다. 그는 서예를 독학으로 배워 일가를 이루어 경기도여성회관에서 서예강좌를 오랫동안 맡으면서 많은 후학을 길러낸 인물이다.
당시 경기도 문화공보실 학예연구사 이신홍 선생의 전언에 따르면 장안문 글씨는 조병규 도지사가 쓴 것을 양근웅씨가 도청 문화공보실에서 개칠(改漆)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개작된 장안문 글씨는 당시 화성복원의 시공업체인 대림산업에 전달되었고, 대림산업 시공과장 이웅철 선생을 통해 신응수 대목에게 넘겨졌다. 당시 대목장이 각을 하던 시절이었기에 장안문 현판 글씨의 판각은 신응수 대목이 하게 된 것이다.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낙천 선생이나 신응수 대목장은 장안문 현판 글씨는 김종필 총리의 글씨가 아니었다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종필씨는 왜 본인이 쓴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국무총리실 일정표 등의 자료에 기초하여 장안문 현판 글씨를 쓰게 되어 있던 것을 쓴 것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장안문 현판 글씨를 썼으나 실제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더욱이 1972년 부소산성의 ‘반월루(半月樓)’, 1973년 부여 궁남지의 ‘포룡정(抱龍亭)’ 등의 사례에서 보듯 국무총리 재임 당시 쓴 김종필의 현판 글씨에는 ‘국무총리 김종필’을 쓰고 낙관을 함으로써 그의 글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동민 옛 수원 땅인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 출생이다. 3.1운동의 격렬한 항쟁지였던 고향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으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과 근대불교사로 중앙대학교 석 ·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수원시사편찬에 관여하면서 수원시 역사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현재 수원화성박물관 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