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호 [잡동사니 고전 인문학] 신라인 혜초가 천축국(天竺國)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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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고전 인문학]

1300여 년 전, 신라인 혜초가 천축국(天竺國)을 가다



글 황미숙 ‘문명고전작은도서관’ 지기 그림 김병하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왕오천’ 그리고 ‘축국전’이라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왕(往)은 ‘가다’의 뜻이고 천축국은 ‘인도’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인도는 다섯 지방,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천축으로 나뉘어 있었다. 혜초가 서역에 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왕오천축국전』에서 혜초는 마가다국(摩揭陀國)의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에 도착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깨달음의 지혜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不慮菩提遠)
어찌 녹야원이 아득할 것인가. (焉將鹿苑遙)
다만 근심은 험한 벼랑길 뿐 (只愁懸路險)
업풍(業風)이 몰아쳐도 개의치 않네. (非意業風飄)
여덟 탑을 보기란 진실로 어려워 (八塔難誠見)
어긋난 세월 지나며 불에 타기도 했네. (參差經劫燒)
이렇게 사람의 소원이 이뤄지다니 (何其人願滿)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目睹在今朝)



혜초는 석가모니가 ‘위없는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얻은 그 보리수를 기념해서 지은 마하보리사 탑을 만났다. 8대 탑을 직접 보기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나마 어긋난 세월이 지나면서 불에 타버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드디어 혜초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던 탑을 만난 것이다.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는 일도 어렵다고 여기지 않았고, 녹야원(鹿野苑:부처의 최초 설법 장소)을 향하는 길도 힘들다고 여기지 않았던 혜초는 목숨 건 여행길에서 소원을 이루었노라고 탄식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인도로 ‘8대 성지순례길’을 떠나듯, 혜초는 8대탑 순례를 위한 구도(求道)의 수행 길을 나선 것인가.
젊은 날 설악산 산행 길에서 반백의 보살님을 만났다. 흰 치마저고리 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 자루 하나씩을 이고 있었다. 잠시 쉬는 짬에도 머리에 인 자루는 내려놓지 않았다. 보살님 머리에는 한 됫박 정도의 쌀이 담겨져 있었다. 부처님께 올릴 공양이라서 내려놓지 않는다고 하였다. 누구나 소원 한가지씩은 마음에 담고 있으리라. 봉정암을 오르기 위한 길이 구도하는 길이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쯤이면 깊은 산중의 그 가파른 길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우리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부처의 길을 만나는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혜초는 704년 신라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중국의 광주에 가서 인도의 스님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불경 공부를 하다가 723년 배를 타고 인도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금강지의 권유로 떠난 길인 듯싶다. 그는 인도의 여러 지방을 두루 거치고 현재의 카슈미르,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국 장안에서 스승 금강지와 8년간 밀교(密敎)경전을 연구하고, 한문번역을 하였다. 불공(不空)의 6대 제자 중 제 2인자가 되었다. 중국의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공부하다가 생을 마친다.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혜초는 토화라(吐火羅), 곧 오늘날 아프카니스탄 최북단으로 러시아 접경에 자리한 토카리스탄에서 시를 쓰고 있었다.



차디찬 눈은 얼음과 뒤섞이고 (冷雪牽氷合)
찬바람은 땅이 찢어지도록 부네. (寒風擘地裂)
큰 바다는 얼어붙어 단을 깔아 놓은 듯 (巨海凍墁壇)
강물은 제멋대로 낭떠러지를 갉아먹네. (江河凌崖嚙)
용문폭포 같은 물은 얼어 끊어지고 (龍門絶瀑布)
우물 입구 도사린 뱀같이 얼음이 엉키었네. (井口盤蛇結)
횃불을 들고 오르며 읊조리니 (伴火上胲歌)
어찌 저 파미르고원 넘어가려나. (焉能度播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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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서역 기행 행로 [출처 : https://namu.wiki]

바다 같은 황무지 고원 토화라에서 혜초는 서있다. 눈보라는 칼날 같이 거세고, 찬바람은 땅을 흔들어 찢어 놓는 듯 매섭게 불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대지는 단을 쌓아 놓은 듯하고, 벼랑 아래의 강물은 강기슭을 물어뜯는 듯 제멋대로 솟구쳐 떨어지고 있었다. 용문폭포 같은 물은 꽁꽁 얼어 끊어지고, 우물 아가리에는 도사린 뱀처럼 얼음이 ‘또아리’ 틀 듯 엉키어 있었다. 그래도 혜초는 이곳 토화라를 지나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파미르를 건너야 했다.
『왕오천축국전』에는 모두 5편의 시가 있다. 이 시에서 혜초는 가슴 깊은 곳 여린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비록 구도를 위해 나선 발걸음이었으나 이러저러한 어려움을 겪는 나그네 심정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혜초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동쪽으로 신강성의 타크라마칸 사막의 변두리를 지나 쿠차[庫車]에 도달한 것이 ‘개원(開元) 15년(727) 11월 상순’이었다. 신라 성덕왕 26년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장정 길이었다. 쿠차는 서역 길에 위치하며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로 현재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속한다.
그리고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인 동양학자 펠리오(Pelliot, P. 1878~1945)가 중국둔황의 천불동석굴에서 발견했다. 책은 앞뒤가 떨어져 나가서 227행이 남아 있는, 높이 28.5센티미터, 길이 358.6센티미터의 두루말이 사본(寫本) 형태로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2010년 12월 18일부터 2011년 4월 3일까지 서울나들이를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가 신라인 혜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9세기 초 당나라의 학승 카슈미르인 혜림(慧琳, 768~820)은 불교문헌들 속에 있는 어려운 어구들의 음과 뜻을 풀이해 놓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를 엮을 때 『왕오천축국전』의 어휘들을 그 속에 수록했다. 이 책을 근거로 『왕오천축국전』은 두루마리가 아니라상 · 중 · 하 3권짜리의 더 길고 자세한 여행기였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羅振玉)에 의하여 『왕오천축국전』임이 확인되었고, 또한 혜초가 신라인이란 사실은 1915년 일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밝혔고, 국내에서는 1943년 최남선이 원문에 우리말 해제를 붙이면서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동서 대륙을 잇는 대동맥인 ‘비단길’이라고 알고 있는 실크로드는 우리에게는 ‘서역길’이다. 혜초가 살았던 당시에 이 서역으로 가는 길은 구법을 위한 길이었다. 지금은 잘 닦여진 도로와 비행기로 찾아갈 수 있는 길이지만, 혜초와 삼장법사등 구법승들이 걸었던 길은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돌아올 수 없는”이란 뜻의 타클라마칸사막을 넘어야 했던 그들의 열망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는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그릇을 쓰고 일회용 물품들을 이용하며, 조금의 불편도 감내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들은 조심하고 참고 견디며 끝까지 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든 요청만하면 어떻게라도 마련해 주었던 우리들의 부모님 덕분에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에 몰입되어 본질은 오간데 없고 껍데기에 연연하며, 탐욕에만 매달리는 현상이 더욱 피폐한 현대인을 양산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열망을 찾아가는 이들에 대한 경외심이 더욱 커져가는 이즈음이다. 정작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들은 소외되고 폄하되고 무관심에 빠져버렸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황미숙 수원 교동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여 중앙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영동시장 귀퉁이에서 콩알만 한 ‘문명고전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며, 한문고전 번역과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수원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의 삶을 기록하여 보존하고 정리하는 아카이브[기록보관]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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