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호 [인물포커스] 그냥 성실하게 직진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 수인선 기관사 장인상






[인물포커스]



그냥 성실하게 직진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 수인선 기관사 장인상



수인선은 그리움이다. 수여선은 아득한 추억이다. 인생을 살면서 함께 옛날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의 공유와 동질감 확인의 차원을 넘어 삶을 되돌아봄이요, 내 정서적 기원과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수인선, 수여선은 그런 옛 추억을 향해 열린 출구라 할 수 있다.



글 조성면 문학평론가, 시민문화팀장







멈추었지만 멈추지 않은 철도인의 열정



사서史書를 읽고 전기傳記를 탐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라, 즉 “옛 것을 충분히 익혀 새로운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는 『논어』의 저 유명한 경구도 따지고 보면 반추와 회고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지금의 삶을 살피고 미래의 방향을 찾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표현임에 다름 아니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와 신재생에너지 산업도 중요하고 빅 데이터로 무장한 새로운 신적 인간(호모 데우스)의 출현도 우리 시대의 화두이겠지만, 때로는 멈추고 거꾸로 가보는 것도 우리의 삶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이제 ‘화성역’과 ‘동차’와 ‘동죽’(조개의 일종)과 ‘밤게’(서해안 갯벌에 서식하던 작은 게를 지칭하는 지역방언)를 기억하거나 이들을 화제로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얼마 전까지 그것들은 엄연히 우리의 삶이고 생활이며 문화였다. 수인선 복선전철의 개통을 앞두고 평생 수인선과 수여선 등을 운전하며 평생 철도인鐵道人으로 살아온 장인상 선생님을 모시고 정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수원농고를 졸업하고 1963년 2월 28일 <고원 22호>로 수원역 철도청 직원이 됐어요. 당시 졸업해도 특별한 일자리도 없던 차에 사촌 매형의 권유로 인부로 취직했지요. 일 년 만에 시험에 합격하여 1964년 4월 6일 정식 기관조사가 됐어요. 조사 딱지를 떼고 정식으로 기관사로 발령받은 것은 1968년 7월 4일입니다.”

장인상 선생님의 본관은 단양丹陽, 1937년 정축년丁丑年 소띠다. 명리학의 관점에서는 정축년 붉은 소띠생들을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자기고집이 강하며, 성실하면서도 불같은 성질을 지녔으며, 기술과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본다. 물론 태어난 해인 연주보다는 태어난 날인 일주가 더 중요하긴 하지만. 어쨌든 선생은 화성시 안녕면에서 태어나 세류초등학교와 농림학교(지금의 수원농생고) 축산과를 거쳐 경춘선·경원선·경의선·수인선·수여선 등을 거쳐 지하철 2호선의 기관사로 정년퇴임한 철도인이며, 지역사의 산 증인이다. 산수傘壽를 넘긴 팔순 고령임에도 목소리며 기억력도 또렷하고 여전히 강건하다. 건강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런 건 없다며, “소띠라 일복을 잔뜩 타고났는지 평생 일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계속 일했던 게 아직 습관처럼 남아 있어요.”



화성시와 안산시를 잇는 수인선 빈청철교의 모습 / 수인선, 수여선 기관사 장인상 선생님



‘꼬마열차’, ‘동차’로 불리던 수인선의 열차들



수인선은 단선 협궤열차로 “꼬마열차”, “동차”로 불렸다. 1937년 7월 19일 개통되고 8월 6일부터 정식 운행을 개시하여 1995년 12월 31일 종운식을 갖고 폐선될 때까지 58년 동안 수원과 인천을 왕복하던 서민열차였다. 조지 스티븐슨에 의해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널리 상용되는 1435mm를 표준궤라 하고, 이보다 넓으면 광궤 좁으면 협궤로 분류한다. 수인선은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라는 물류회사가 부설한 사설철도로 협궤열차였다. 수인선의 쌍둥이 형님뻘인 수여선도 수원-이천-여주를 왕복하던 협궤열차로 역시 조선경동철도가 부설했다. 수원-이천-여주를 왕복했으며, 1930년 12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여 1972년 4월 1일 폐선된 수인선의 형님이었다.

수인선은 당초 지역민을 위한 애민사업이 아니라 일본 경제인들을 위한 수탈의 노선이었기에 부설 당시 토지 수용에 따른 보상 문제와 소래철교의 등장에 따른 중선급中船級 어선의 통행에 문제가 되어 중소지주와 소래 지역 어민들의 반대운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수인선의 등장이 수원·화성·안산·시흥·인천 사이 내륙의 주민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전례 없이 지역 간의 교류가 크게 활성화하였고, 물류 유통과 출퇴근 및 통학이라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고도 빈번했고, 부설 초기의 몇 년을 제외하고 늘 적자를 면치 못한 노선이었으나 지역민들에게 “꼬마열차”로 불리며 시인·묵객들, 또 연인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특히 장날 농산물을 수인역·송도역·수원 역전시장과 남문시장으로 내다팔아 생필품을 사야했던 농민들, 인천과 수원 사이의 학교로 통학하던 학생들에게 수인선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이동 수단이었던 것이다.

“제가 기차를 몰 때 수인선과 수여선은 주로 통근열차로 이용됐어요.언제인가 전국체전 때는 수인선으로 지붕이 없는 무개화차 10량으로 승객들을 태우기도 했어요.”

“그때 다니던 증기기관차는 두 종이 있었는데 ‘파시’는 대형기차고, ‘혀기’가 소형이었지요. 총 8대가 있었는데, 1, 2호차가 소형, 12, 13, 14호차가 대형열차였지요. 조개탄을 연료로 썼고, 용인·이천·수원에 물탱크가 있었어요. 단선 협궤라 수여선은 신갈에서 상, 하행선이 서로 교행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파시는 석탄과 물을 공급하는 탄수차炭水車로 대형증기기관차였고, 혀기는 파시보다 규모와 출력이 작고 약한 소형이었다. 퍼머넌트를 ‘파마’로 줄여 부르는 것처럼 ‘파시’와 ‘혀기’ 모두 일본식 조어다. 파시는 퍼시픽pacific의 일본식 약칭일 것으로 추정되나 혀기는 어떤 단어의 약칭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1960년대 말엽과 1970년대 초반 수인선과 수여선은 통학생과 근로자들을 위한 객차, 화물 수송을 전담하던 중간차, 이 둘을 섞어놓은 혼합차 등으로 운영되었다. 통근열차 등의 여객 수송과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물류 유통의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한 셈이다.



“ 앞만 보고 성실하게 살은 거지 뭐. 기차가 후진하면 안 되잖아요. 목적지만 보고 길 따라 쭉 직진해서 잘 가야지.”



소중한 근대 철도교통 문화 유산인 빈정철교에 대한 보존대책이 시급하다.



직진만 했던 수인선의 흔적과 유적들



“수인선은 열차가 작다보니까 크고 작은 사고가 더러 있었어요. 1970년 초로 생각되는데, 홍수가 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어천역 근방 하천의 제방의 하부가 유실되어 교량이 사다리처럼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던가 봐요. 기차가 그 다리를 지나가다 탈선하여 열차가 물살에 밀려 백 미터가량 떠내려간 적도 있었어요. 또 동절기에 폭설이 내리면 선로가 보이지 않아 열차운행이 중단되는 경우가 잦았어요.”

현재 수인선은 新수인선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불과 20여년 만에 완벽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옛 흔적이라고 해봐야 세류공원·화산터널·빈정철교·안산의 고잔역·소래철교·승기철교·송도역사松島驛舍·송도역 물탱크 등이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더 늦기 전에 남아있는 수인선의 흔적과 유적들이라도 체계적으로 보존되었으면 하는 간절함과 조급함이 남는다. 장인상 선생님을 모시고 종횡으로 수인선의 흔적을 쫓다보니 예정된 시간이 한참 지났다. 아쉽지만, 이제 정리해야 할 시간이 왔다. 장인상 선생님이 철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히 1963년 수원역 인부로 취직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내처 그 해 12월 큰어머님의 소개로 지금의 사모님을 중매로 만나 결혼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평생을 기관사로, 철도인으로 살아왔다. 철도인으로 평생을 바친 소감을 묻는 마무리 질문에 어색하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잠시 침묵하더니 마지못해 한 마디 덧붙이신다.

“다들 마찬가지였겠지만 식구들 먹여 살리고 그러느라 딴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냥 앞만 보고 성실하게 살은 거지 뭐. 기차가 후진하면 안 되잖아요. 목적지만 보고 길 따라 쭉 직진해서 잘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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