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호 [문화읽기] 덕후,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강요되다



[문화읽기]

덕후,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강요되다



요즘 TV에선 혼자 살며 수집광적인 모습을 보이는 연예인이나, ‘취미가 곧 일, 일이 곧 취미’라는 ‘덕업일치’ 뉴스가 심심찮게 보인다. 이런 사람들의 단면에서 그동안 헛짓거리를 일삼거나, 변태성욕자나 사회부적응자쯤으로 알려진 ‘오타쿠’를 연상할 수 있는데, 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오타쿠스러움’을 강요받고 있는가?



글 정호훈 문화칼럼리스트 일러스트 아방



찌질이와 전문가 사이의 담 론 , 오타쿠



사회는 항상 아젠다를 던짐으로써, 영리하게 대중을 이끌어 간다. 올해의 아젠다는 각자 살아갈 바를 도모하라는 ‘각자도생各自圖生’과 인생은 한 번 뿐이라는 ‘욜로 YOLO’다. 소비사회를 유지해야겠으니 마음껏 소비하라고 부추기면서도, 사회가 개인을 책임 못 지니 알아서 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여기에 ‘덕업일치’ 아젠다가 추가됐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식의 술자리 인생 상담 같은 말을 왜 하는 걸까? 정말 우리가 취미를 일로 삼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걸까? 오히려 그것은 오타쿠스럽게 살아도 ‘먹고 살 수 있다’며 실업의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며, 침체된 경기 부흥을 위해 오타쿠스러운 소비 트렌드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오타쿠オタク란, 1970년대부터 일본에 나타난 애니메이션, 게임, 비디오 등의 팬들을 의미하는데, 소수 집단에 의해 광적으로 숭배 받는 컬트cult나, 특정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팬덤fandom과 혼용되기도 한다. 한 분야에 심취해 있다는 의미에서 마니아mania와 같지만 집착과 중독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산다는 점에서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와 같지만 친목을 형성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그런데, ‘집 안에 틀어박혀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람’ 정도로 통용되던 ‘오타쿠’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계기로 부정적인 단어가 된다. 살인사건의 주인공은 좁은 방 가득 만화, 비디오, 게임을 쌓아두고 사회와 단절된 상태였는데, 일본사회는 이러한 개인의 오타쿠스러움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반사회성’으로 나타난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타쿠계의 애플과 같은 가이낙스사社의 전前 대표 오카다 토시오는 오타쿠가 일본 장인 정신의 계승자이자 그 문화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오타쿠스러운 사람을 ‘덕후’(오타쿠의 한국식 표현인 ‘오덕후’의 줄임말)라 한다. 주로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본의 오타쿠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거나 ‘VJ특공대’ 류의 TV프로그램에 희한한 사람으로 출연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능력자 내지는 학위 없는 전문가로 보여지고 있다. 찌질이에서 전문가라니. 오타쿠는 일본에서도 여전히 부정적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는데 말이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의 장기 불황의 타개책으로 제기된 문화정책 ‘쿨 재팬Cool Japan’에서 오타쿠 문화가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에서 소프트 파워로 기능한 이후, 오타쿠가 ‘신新 문화의 첨병’으로 변모했던 과정이 한국사회에 그대로 반영된 것일까?



덕 후 , 포 스 트 모 더 니 즘 시 대 의 첨 병 이 되 다



이러한 ‘덕후 현상’의 본질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규칙, 권위, 규율, 통제 등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을 해체하려는 경향으로, 그것은 사회적으로 권위를 부여받은 지식인의 권력마저 해체한다. 여기에 지식 자본주의 혹은 정보사회는 노동, 자본, 토지라는 생산요소 대신 지식이라는 새로운 자본의 형태로 지배하는데, 그 길목에 전통적인 지식인 대신 덕후가 있다. 즉, 권위가 부정되고 지식이 중요한 시대에 전문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덕후가 학위 대신 조회수와 팔로워수로 전문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스트인 프랑스 철학자 료타르는 학습이 컴퓨터 언어로 번역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선생이 기억 장치에 의해서 대치되는 만큼 수업은 컴퓨터의 자료은행에 단말기를 연결한 기계로 위임되며, 우리가 지식이라고 했던 고등교육, 학위 등의 조건이 붕괴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셸 푸코는 권력은 전통적인 개념과 같이 ‘지배형태’가 아니라 사회속에서 지식을 근간으로 하나의 그물망처럼 작동하며, ‘강제하는 힘’이 아니라 (아젠다 세팅이나 프레이밍처럼)우리의 생각을 조정하여 ‘스스로 하 게 만드는 힘’이라고 하였다. ‘MADE IN 덕후 정보’에 의해 먹고 사고 만나고 일하는 우리의 일상을 보라. 우리는 덕후의 정보를 소비함으로써, 세상을 보고 배우고 따라 한다. 그렇게 덕후는 기존의 권력을 해체하고 대신 그 자리에 스스로 권력이 되어 가고 있다.

또한 덕후는 독특한 문화현상이자 엄청난 규모의 경제효과를 창출하는 소비시장으로 평가되었으며, 브랜드의 홍보대사이자, 스토리텔러이자, 인플루언서로 기능하면서 중요한 의미가 되어간다. 소비사회와 미디어는 덕후를 이용하여 끊임없는 소비를 강요하며 영리하게 ‘돈벌이’를 하고 있지만, ‘잘되면 덕후’, ‘못되면 찌질이’라는게 사회의 시선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덕후들의 전성시대니, 덕업일치라는 말에 낚여 스트레스 받을 필요도 없지만, 남과 다름에 "그게 밥 먹여 주냐?"라는 핀잔에 기죽을 필요도 없다. 다만, 덕후 현상을 보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정호훈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광고홍보학을 전공해 한국영상대 겸임교수로 미디어 분야, 여론 분석 및 PR컨설팅 분야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경영과 브랜드마케팅을 비롯해 문화와 심리학 칼럼니스트로서 활동 중이다.




댓글달기_글자수 500자로 제한되며 욕설, 비방글 삭제됩니다.

댓글입력
  • 댓글 내용이 없습니다 ..



수원문화재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