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호 정조의 흔적을 찾아서, 수원 팔색길 세 번째 효행길 여행


수원 팔색길 중 효행길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참배할 때마다 왕래하던 길로, 효행공원을 시작으로 노송지대와 만석공원, 장안문과 화성행궁을 거쳐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 지점까지 12.3km에 이른다. 평소 불효자로 소문난 나로서는 다소 부끄럽지만 순례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걷기로 한다.

글·사진 김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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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여행 | 화성행궁



다만 무언가를 빌 수 있다는 작은 희망 같은 것 효행길을 여행했다. ‘나는 효자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런 생각 때문에 끝내 외면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침 수원 여행을 계획한 날이 <수원 문화재 야행>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수원 문화재 야행은 화성행궁과 화령전, 팔달문 일대에서 열리는 밤의 축제로, 팸플릿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한국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효심과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으로 축성한 …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그러니까 화성행궁과 정조는 다이나믹 듀오의 최자와 개코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고, 정조를 테마로 여행하려면 효행길을 선택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무더운 어느 여름날, 오래된 궁궐에서 저녁 산책을 시작했다. 수원 문화제 야행의 프로그램은 화성행궁 곳곳에서 벌어졌다. 행궁동 담장에는 작은 물건들을 파는 마켓이 열렸다. 이름을 새겨주는 도장, 직접 빚은 도자기, 은빛 액세서리 같은 걸 팔았는데 저녁 햇살을 받자 두 배쯤 근사해 보였다. 나는 채소 인형을 몇 번이고 손에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나보다 더 좋은 주인을 만나기를 바라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하마터면 살 뻔했어.’ 얼마나 자주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행궁동 정조살롱이라는 카페에서 가배咖啡를 마시며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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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테이블을 펼쳐 일정을 살피고 시간에 맞춰 광장으로 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화성행궁의 야간 개장을 기다렸다. 우리는 머리를 양 갈래로 딴 가이드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텅 빈 행궁을 걸었다. 그러다 잠깐씩 멈춰 설명을 들었다. 사연의 주인공은 단연 정조였다. 1795년 을묘년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한양에서 수원까지 긴 행차를 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몇 가지 ‘알아두면 폼 좀 잴 수 있는 정보’들을 얻었는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동갑내기라는 것(말하자면 같은 학번), 정조가 불과 200여 년 전의 사람이라는 것(날이 더우면 그도 우리처럼 냉면에 만두를 먹지 않았을까)이었다. 그가 생각보다 멀지 않은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조금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근엄한 왕의 초상을 걷어내면 남 몰래 코도 파고 방귀도 뀌는 이웃집 할아버지가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 밤이 무르익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채웠다. 사람들은 왕의 행렬을 따라 걷다가 순라꾼(순찰을 도는 사람)과 신윤복의 말싸움을 구경했고, 왕비 소속의 무녀들이 제를 올리는 장면 앞에서는 조금 겁이 난 표정으로 서 있기도 했다. 공방거리에서는 재능 기부 형식으로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부채와 호패를 함께 만들거나 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이기도 했다. 나는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밤의 축제가 꽤나 성공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 속의 인물을 소환해 지금 이곳의 아이와 눈 마주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온 가족이 천천히, 다정히 걷는 시간은 또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했다.나는 커다란 달 앞에서 노인과 아이가 작은 손을 맞잡고 소원 비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곳의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그들이 무엇을 빌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다만 무언가를 빌 수 있다는 작은 희망, 그런 것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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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여행 | 융건릉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명확함으로 장담컨대 수원을 여행하며 정조의 이름을 한 번도 듣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정조 없는 수원은 그야말로 삶은 달걀이 올라가지 않은 쫄면과도 같다. 한마디로 정조는 수원의 노른자 같은 존재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묘가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수원시가 아닌 화성시다(수원문화재단 사람들 자존심에 금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효행길’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살아생전 정조의 행차 마지막 목적지였을 터, 나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융건릉으로 향했다.여름이었고, 정수리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매표소에서 날벌레를 쫓으라며 부채를 나눠줬다. 더위에 벌레라니. 정조가 아무리 점잖았다 한들 2019년의 지구 온난화를 경험했다면 러닝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녔을 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왕의 묘로 향하는 길에는 높게 솟은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소나무는 태양을 막아 온도를 낮춰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날벌레의 진원지였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공정함. 그것이 조선시대 왕좌의 자격을 증명하려는 의도라면 이 소나무 숲은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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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벌레와의 사투 끝에 도착한 곳은 비극의 아이콘 사도세자(추존왕 장조)의 융릉이었다. 용(왕)이 머물도록 만든 연못 곤신지와 금천교를 지나자 멀리 너른 들판 언덕에 자리한 왕의 흔적이 보였다. 왕릉 구조는 보통 능침과 정자각이 일직선상에 놓이는데, 융릉은 정면에서 조금 빗겨난 곳에 봉분이 있었다. 후에 찾아보니 풍수지리상의 이유였다고 하는데, 혹자는 뒤주에 갇혀 죽은 세자의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고도 했다. 이유야 어쨌든 관습적이지 않은 구조가 남들과 다른 운명을 살다간 사도세자의 생을 그대로 본뜬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정조의 건릉은 융릉 구석에 난 사잇길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무성한 풀로 뒤덮인 산책로는 여치와 메뚜기,사마귀처럼 온통 푸르고 탄력 넘치는 곤충들의 왕국이었다. ‘역시나 효행은 쉽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겨우 도착한 건릉은 아버지의 묘와 거의 흡사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홍살문 바깥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태양 아래 빛나는 왕의 무덤을 바라봤다. 그늘 아래 머무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차림새로 보아 동네 주민들 같았다. 그들은 부채질을 해가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는데, 이장네 집 나간 아들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조선 왕조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인 듯했다. 구멍가게 평상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를 왜 하필 조선왕조 22대 왕의 무덤 앞에서 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어쩌면 그들의 눈에는 이토록 잘 조성된 공원에 공부하듯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를 테니까.



발밑으로 죽은 매미를 끌고 가는 개미의 행렬이 보였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매미를 나눠 먹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빛이 산란하고, 젖은 땅에서 버섯이 자라고, 죽은 자의 무덤을 산 사람이 산책하는 풍경.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명확함으로 삶과 죽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걸 한여름 소나무 숲에서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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