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호 가을에는 잠시 빌려온 풍경 속에 앉아


단풍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이상하게도 오래된 풍경 속을 걷고 싶어진다. 그럴 때 고궁이나 성곽길 만큼 좋은 산책로도 없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와 건축물이 어깨를 기대듯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일까.

글·사진 김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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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녀는 먼 시간을 바라보고 싶다 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던 친구는 장래희망을 ‘고고학자’라 말했었다. 고고학자가 꿈인 사람은 그때 처음 보았다. 미래를 꿈꾼다는 건 모름지기 미래지향적이어야 했으므로, 고고학이란 말이 지닌 과거지향적인 느낌 때문인지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가서 고고학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찾아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직업이 있다는 것을 막연히 아는 수준이어서 과연 고고학자가 된 친구가 무슨 일을 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찾아본 자료 속에서 고고학자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수천 년 전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집터와 무덤, 그릇 같은 것으로 까마득히 먼 시대의 생활을 짐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하는 한편으로 동그란 안경 너머, 친구의 눈빛을 떠올렸다. 차분하고 명료한 눈빛. 친구에 대해서도 고고학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면서 어쩐지 그 둘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고고학자가 되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은 어쩐지 알 것 같다. 그것은 ‘시간’을 바라보는 일이리라.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 우리 눈앞의 시간이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온 시간의 축적임을 아는 일. 그러니 미래에 고고학자가 되는 삶과 인터넷 매체 연예부 기자가 되는 삶이 있다면, 그 둘은 전혀 다른 시간을 살게 되지 않을까. 후자의 삶이 현재를 끊임없이 새로 고침하며 초 단위의 뉴스를 좇는 거라면, 전자의 삶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 이 땅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간까지를 바라볼 것이다. 그것은 다시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명료한 눈빛을 지닌 내 친구는 고고학자가 되지 못했다. 전혀 다른 학과로 진학을 했으니까. 하지만 가끔 나는, 열일곱에 그런 말을 하는 소녀의 마음과 그렇게도 일찍 먼 시간을 건너다보던 시선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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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래전 사람들이 빌려다 놓은 풍경

가을 산책 중 가장 좋아하는 일은 창덕궁 후원에 가는 일이다. 평소엔 해설사와 함께 한정된 시간 내에 정해진 동선으로만 관람을 해야 하지만 이때만은 다르다. 매년 봄가을, ‘후원에서 만나는 한 권의 책 행사’가 진행되는 기간에는 해설사와 함께 입장하되, 이후부터는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문을 닫는 시간까지 조바심내지 않고 구석구석을 거닐 수 있다는 점도, 후원 곳곳에 깃든 정자에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 단풍을 보며 호젓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자꾸 주변에 알리고 싶어지는 나는, 창덕궁 후원을 알게 된 뒤로 가을마다 같은 소리다. 거기 가봐. 진짜 좋아(물론 가장 좋아하는 건 나 같지만). 무엇보다 후원은 궁 같지가 않아서 좋다. 처음 갔을 땐 서울 한복판에 갑자기 이런 숲이 펼쳐지다니, 싶었다. 오솔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면 꾸미지 않은 연못이 나타나고, 300년이 넘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해설사의 설명은 더 근사했다. 우리나라의 조경 원리를 예부터 차경借景, 즉 경치를 빌려왔다 말하는데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이곳 후원이라고. 옛날 사람들이 잠시 빌려다 놓은 풍경 속을 걷다가 앉다가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 시절 이곳을 거닐었을 이들이 상상됐다. 네모난 연못과 그 가운데 동그란 섬으로 이루어진 ‘부용지’에서 왕이 신하들과 시작詩作을 겨루다 정해진 시간 내에 시를 짓지 못한 신하를 섬에 유배 보내곤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더더욱.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어떤 시도 짓지 못한 초조한 마음과 그런 이를 귀해 하면서도 놀리는 마음으로 유배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동그란 섬에 조각배 태워 보냈을 왕의 마음, 그때 이곳에 유쾌하게 퍼졌을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상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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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토록 무한한 우주에서 유한한 내가

여기 온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려나? 다들 어떤 사연으로, 어떤 마음으로 오늘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생각은 이내 눈앞의 사람들에게로 이어진다. 오르막길을 나란히 오르는 중년 여성 셋의 뒤를 따라 걸으며 저들이 고등학교 동창일까, 아니면 동네 친구들일까, 짐작해보기도 하고, 낯선 나라의 궁궐에서 한복을 입고 걸어 다니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오늘 하루 어떤 사진들을 찍었을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수령이 300여 년에 이르는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앉아 은행잎을 만지작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겐 이게 얼마 만에 나선 창덕궁 나들이일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같은 곳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서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 역시 나처럼 오랜 시간 속을 산책하며 그 시간이 주는 위안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닐까 하고. 

올해 초 태국 치앙마이에 머물 때도 그랬다. 돌아보면 그곳에서 가장 좋아하던 시간은 이른 아침의 사원에 홀로 앉아 있을 때였다. 화려한 장식의 건물에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숙소 근처 작은 사원의 나무 아래 앉아 세월의 더께가 시커멓게 내려앉은 코끼리 석상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평온해지곤 했다. 그건 아마 별을 바라보는 천문학자의 마음과 비슷했으리라. 이토록 무한한 우주에서 유한한 존재인 내가 점과 같은 시간을 살 때, 시간이 너무 광활해 그 앞에서 이 삶이 보잘것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일무이한 순간임을 깨닫고 마는 그런 것. 

시간을 생각하며 시간 속을 걷기에 역시 가을만큼 좋은 계절은 없다. 창덕궁이나 창경궁, 서울의 성곽길, 수원의 화성, 경주의 왕릉 같은 곳들. 운이 좋아 계속해서 가을을 맞는다면, 계속해서 그런 곳을 찾아가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다 자란 내게 누군가 장래희망을 물어온다면, 가만히 앉아 오래된 시간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싶다. 비록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오래된 풍경 속을 오래도록 산책하며 점과 같은 이 삶에서, 지금 흐르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장래희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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