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호 산책의 한 방식, 수원 팔색길 네 번째 '화성 성곽길' 여행


수원화성은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다.

화성은 사람들 속에 있고, 가끔 바람도 분다.

있는 듯 없는 듯 거기 있지만 막상 다녀온 다음에는 계속 생각이 나는 곳.

나는 화성을 산책한다.



글·사진 김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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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지같은 산책



 



내가 걷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배낭여행을 다니면서부터다. 그때는 가난했고, 대신 튼튼한 다리와 지도가 있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다만 ‘웬만함’의 기준이 남들과는 조금 달라서, 당시 함께 여행하던 친구는 길 한복판에 배낭을 집어 던지며 내게 욕을 할 정도였다. “거지같이 이러지 말고 택시를 타자.” 하지만 나의 끈질긴 설득에 친구는 울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묘하게 일그러진 친구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웃었다. 어쩌면 그때 친구를 놀리며 느끼던 묘한 쾌감 때문에 내가 걷는 걸 좋아한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나는 여전히 전투적이고 거지같이(?) 걷는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88올림픽을 봤고, 2002월드컵도 봤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버스를 타고 향한 곳도 서울이었다. 계속 서울에 살았더라면 내 산책로는 강남역이거나 청계천, 서울숲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상수역 뒷골목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수원으로 이사한 다음부터 나는 주로 화성을 걸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라는 수식이 붙기는 했지만 화성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장소는 아니다. 담담하게 지어진 성곽이 있고, 사방으로 성문이 있고, 아름드리나무와 쉬기 좋은 정자가 있는 곳. 성곽 안쪽에는 딱 봐도 문화재처럼 보이는 행궁이 있고, 순댓국 아줌마도 있으며, 나이키 매장도 있다. 아 참, 평양냉면집도 하나 있다.

화성은 생각보다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어서(그래 봤자 전투적 걸음으로 2시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가까이에서는 큰 그림을 그리기 힘들다. 그러니까 화성에서의 산책이란 곧 성벽을 따라 걷는 것을 의미한다. 성벽 안쪽으로 이어진 흙길에만 올라도 거의 모든 건물의 지붕을 볼 수 있는데, 법으로 건물 높이를 제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래된 석벽을 더듬으며 태어난 적 없는 먼 옛날을 상상하다가도, 고개를 돌려 옥상에 널어놓은 고쟁이 빨래나 볕 쬐는 고추 같은 것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곳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아주 조용한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느낌이어서 내 걸음도 잔잔히, 조금은 덜 거지같이 느껴진다.

사실 산책을 잘하는 방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산책을 멋지게 즐기는 소품을 준비할 수는 있는데, 돗자리도 그중 하나다. 천 원짜리 은색 돗자리도 좋고, 히피 분위기가 나는 담요도 괜찮다. 읽을 거리를 가져가도 좋지만 잔디에 누워서 책을 본다면 몇 분 안에 눈이 감길 게 뻔하므로, 굳이 챙긴다면 《인인화락》처럼 무게가 가벼운 책이 괜찮겠다.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만 한다면 캔 맥주 하나 정도도 나쁘지 않다. 특히 성문 안쪽에는 옛날식 통닭을 파는 가게가 많다. 영화 <극한직업>의 흥행에 힘입어 ‘수원 왕갈비 통닭’을 파는 집도 생기긴 했지만, 역시 오리지널만 한 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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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에 적당한 계절



 



처음 화성을 산책했을 때, 그해 첫눈이 왔다. 두 번째 산책길에도 화성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그 겨울에 나는 참 많이도 걸었다. 눈 쌓인 골목을 걸으며 중얼거리던 말들을 글로 썼고, 가끔씩 쓸쓸한 마음이 들고 싶을 때마다 소리 내서 읽었다. 시인이 되지 못한 친구들에 대해 쓴 글이었다. 아주 가끔씩만 시간이 맞는 탁상시계와 엉망으로 번역된 소설책 같은 것들도 이야기했다. 내버리는 것과 내버려두는 것 모두 조금씩 아쉬운, 그런 것들. 그것들은 아직도 내 책상 위에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요즘 설탕도 잘 꺼내 먹는다. 그래서 쓸쓸한 것들을 잘 참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 조금은 쓸쓸하고 또 조금 쓸쓸해도 괜찮은 날이 산책하기에 가장 적당한 계절이라고 말하고 싶다. 달력 속 계절은 무용지물이다. 공기를 숫자로 나눌 수 있을까? 그건 순전히 마음의 일이다. 몇 계절 동안 화성과 그 주변 골목을 걸으며 나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들을 본다. 길가에 버려진 고동색 소파의 주인을 찾았고, 골목마다 그려져 있는 벽화를 누군가가 조금씩 다시 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수원천의 물이 언제 마르고 언제 불어나는지,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아래 연꽃은 언제 피어나는지, 그런 것들.

​비가 오는 날에도 산책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양말이 젖었고, 그러면 양말을 벗었다. 머리가 젖으면 머리를 털었다. 그게 비 오는 날 산책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날에는 책을 챙길 수는 없다. 대신 투명 우산 하나쯤을 가져가는 게 좋다. 투명 우산은 누구나 자주 잃어버리는 물건이어서 부담이 없다. 내가 잃어버린 우산은 또 누군가의 쓸모가 되겠지 생각하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 또 하나 산책하기에 좋은 계절은 마음이 허술해졌을 때다. 그럴 땐 참견자가 한둘 있어도 괜찮다. 마음이 물렁한 상태일 땐 친구 이야기를 오래 들어줄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가령 색깔이 고운 꽃을 볼 때 친구는 그 아래 줄기를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성정이 관련 있다는 그의 말을 생각하면서 몇 번이나 위안을 얻는다. 사무실에 있거나 무언가 일정에 쫓기고 있다면 그의 말은 영혼 없는 상태에서 흘러갔겠지만, 산책을 하는 동안에는 다르다. 걷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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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주관적인 산책로



 



화성은 지하철 2호선이다. 이건 비유다. 홍대입구역에서 잠실역까지 갈 때 어느 방향으로 지하철을 타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산책을 하려면 걸어갈 방향을 먼저 정해야 한다. 물론 화성은 둥그니까 그저 앞으로만 나가면 언젠가는 한 바퀴를 다 돌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리가 튼튼한 사람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는 장안문에서 화홍문과 동북각루를 거쳐 연무대에 이르는 길이다. 동북각루라고 불리는 정자에 앉으면 성곽 바깥과 안쪽을 함께 볼 수 있는데 그 풍경이 참 근사하다. 바람도 좋아서 금세 잠이 오는 곳이기도 하다. 언젠가 정자 난간 옆에서 낮잠을 자다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눈 을 뜬 적이 있었는데, 수원에 사는 옛 스승이 당신의 친구들과 소풍을 나왔다는 거였다. 그날 공짜 술을 먹으며 참 기뻤던 기억이 있다. 이곳에서라면 반가운 얼굴들을 실컷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때부터다.

​ 연무대에서는 활을 쏠 수 있고, 창룡문 앞 잔디에서는 연을 날리는 아이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기본적으 로 언덕이 완만하고 시야가 탁 트여서 뻥 뚫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코스다. 사실 여기에서부터 난감한 상황이다. 성벽을 따라서 팔달문이 보이는 시장 터로 걸을지, 조금 우스꽝스럽지만 색다른 기분을 낼 수 있는 화성어차를 탈지 고민해야 한다. 또 하나, 창룡문 밖으로 빠져나가 지동으로 걸어가는 방법도 있 다. 지동은 골목마다 벽화가 예쁜 동네로, 커다란 교회 건물에 오르면 수원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대를 이용할 수도 있다.

언젠가 카우치 서핑을 통해 외국인 친구를 집에 재운 적이 있는데, 그때도 화성 산책을 함께했다. 그는 대만 사람이었고, 영어가 빨랐다. 모든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시장 음식을 먹고 공방거리를 걸으며 연신 “쏘 쿨So cool”이라고 외쳤다. 뭐가 쿨하다는 건지는 묻지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거리가 어지간히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 나는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식 양념 통닭을 먹이며 잔뜩 허세를 부렸다. 예상대로 그는 흥분했고, 또 흥분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 하나를 선 물해주었다. ​

서장대의 밤. 수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지나온 산책길을 되짚어 보는 일. 서장대 난간 너머로 도시 의 불빛들은 비늘처럼 반짝이고, 조명을 입은 성벽은 금빛 강으로 흐른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풍경 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으로 아껴두었다가 나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을 때마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이곳에 오르곤 했다. 혼자여도 좋고 함께라면 더 좋은 풍경. “여기서 신발을 벗어도 돼?” 외국인 친구가 물었고,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고 대답해주었다. 맨발로 밟은 돌바닥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또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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