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 괜찮은 어른이고 싶다 - 드라마 ‘나의 아저씨’ 촬영지 팔달산 산책길을 걷다


 



익숙한 장소가 다르게 다가올 때가 있다. 감명 깊게 봤던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라면 더 그렇다. 배우들의 대사나 장면의 분위기가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18년 방영됐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그랬다. 이 드라마는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삼형제 가족과 가혹한 현실을 혼자 감당하며 너무 일찍 커버린 한 여성이 서로를 통해 삶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보는 내내 감정의 여러 결이 움직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아파했고, 분노했고, 그리고 위로를 받았다. 우리의 삶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했다. 깊은 울림을 준 이 드라마가 나의 산책길에 들어왔다.



 



글 노영란_작가   사진 박김형준



 



 



 



걷고 싶은 1



 



지안이와 할머니가 달을 보다





짙은 어둠이 내린 밤. 지안은 몰래 가져온 쇼핑카트에 할머니를 태웠다. 가파른 골목 계단을 위태롭게 내려갔다. 동네가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사방이 탁 트인 언덕배기에 이르렀다. 낮은 지붕들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떴다. 맑고 투명한 달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물끄러미 달을 바라보았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달을 보여주고 싶어 지안이가 함께 산책을 나온 것이다. 고단한 하루 끝에 일회용 믹스커피 두 봉지로 헛헛함을 채우던 지안에게 할머니가 동훈을 떠올리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좋은 사람이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산책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영화 ‘ET′를 연상시키는 장면은 지안의 암담한 현실과 달리 몽환적으로 그려졌다. 달을 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이제 곧 두 사람의 삶에도 따스한 달빛이 스며들겠구나.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은 수원 도심 한가운데 아담하게 자리한 팔달산 산책로다. 해발 128미터 높이의 야트막한 산으로, 중간에 산책로가 둘레길로 나 있다. 한 바퀴 도는데 45분 정도, 걸음수로는 6천보 안팎이다. 이곳에서는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성 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봄에는 벚꽃 길이,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초록 숲길이, 겨울에는 눈꽃 풍경이 아름다운 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이 산책길에는 소풍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다정하게 걷는 연인들, 발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 반려견과 속도를 맞춰 걷는 사람들. 나무 그늘아래 낮잠 자는 사람들, 혼자 유유자적 걷는 사람, 차가 다니지 않으니 앞뒤 살피지 않고 천천히 걷기도 하고, 마음껏 달리기도 한다. 그들 사이로 성안 마을 사람들이 매일 산책을 한다. 성안 마을에 사는 나도 이 길로 산책을 한다. 밤의 고요가 좋아서, 밤 산책을 즐긴다. 운동 삼아 걷기도 하고,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바라며 찬찬히 걷기도 한다. 생각해 보니, 「나의 아저씨」를 본방사수한 날 밤이면 빼놓지 않고 이 길을 걸었다. 그때부터 익숙한 산책길이 다르게 다가왔다. 지안이와 할머니가 달을 보았던 그곳에 자주 멈춰 섰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곳이었다. 드넓은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숨을 크게 내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속에서 올라오는 말이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지안을 바라보며 수화로 건네는 할머니의 말, ‘좋은 사람이지?’ 나에게 묻는 말 같았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재지 않는, 동정으로 자족하지 않는, 경직되지 않은 박동훈 같은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무겁던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따스한 기운이 온 몸을 감돌았다. 산책길이 따스해졌다.



 





정희네 술집 같은 곳이 있다





팔달산 숲속에서 소쩍새가 운다. 밤공기가 신선하다. 천천히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하늘 하래 성안 마을을 바라본다. 조명을 받은 성곽이 황금빛 고리모양으로 나의 동네, 성안 마을을 감싸고 있다. 좁은 골목길 모퉁이마다 작은 불빛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먼발치서 내려다보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불빛들이 성곽 빛과 어우러져 은은하니 따스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카페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카페거리로 알려지고 있지만, 낮은 지붕 사이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따라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살림살이를 부려놓고 사는 사람들,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후계동 이웃들처럼, 동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성안 마을은 동훈이네 가족들과 친구들이 사는 동네와 많이도 닮았다. 집과 골목의 형태가 닮아서만은 아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며 노닥거리는 후계동 사람들이 있고, ‘정희네’ 술집 같은 곳이 있다. 저녁밥을 건너뛰면 불러내 같이 밥 먹는 사람들, 마당에서 딴 상추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이웃집 대문마다 걸어두는 손길들, 소고기 대신 빈대떡 한 장 놓고 행복해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동네사람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신경림의 시처럼, 아무 때나 모여서 히히덕거리고 위안 받을 수 있는 이웃이 있다. 박동훈이 아끼는 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 본 지안을 다같이 집까지 배웅하고, 지안의 할머니 장례식을 쓸쓸하지 않게 준비해 주는 후계동 사람들처럼, 기꺼이 자기 자리를 내어주는 성안 마을 나의 이웃들. 좁은 골목만큼, 맞닿은 대문만큼 가까운 ‘사이’가 있다. 극 중에 유라가 막내 기훈에게 말한 것처럼, 망해도, 가진 것 별로 없어도 안심이 되는 곳,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는 이웃들이 있어서 든든하다는 걸, 밤 산책길에 새삼 느낀다. “밥 좀 사 주죠,” 라는 말 한마디에 손 내밀어 줄 이웃들이 있는 우리 동네에서만큼은 인생이 치사하지 않다.



 



 



걷고 싶은 2



 



#잘 늙는다는 것은 괜찮은 어른이 되어가는 일





삶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20대 시절이었다. 선택의 길목마다 허둥대며 몸살을 앓던 그 시절, 나와 내 친구들은 팔달문 근처 골목에서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목까지 차오르던 불덩어리를 안고, 사방이 탁 트인 곳을 찾았다. 동해바다까지 쉽게 갈 수 있던 때가 아니어서, 우리는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 팔달산 산책길로 갔다. 지안이와 할머니가 달을 보던 그곳에서, 말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떴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탁 트인 하늘을 보며 누군가는 한숨을 내뱉었고, 누군가는 울었다.



 



“우리 나이 들어 40대가 되면 좀 편안해질까?”



 



각자의 생활공간이 달라졌고, 우리는 한 계절에 한 번씩 만났다. 시간이 더 지나고는 얼굴이 가물가물해질 때, 한두 해를 넘기고서 만나곤 했다. 벚꽃이 끝물이던 지난 봄날, 우리들은 다시 만나서 이 산책길을 걸었다. 연둣빛 숲길 사이로 오후 햇살이 스며들었다. 벚꽃이 진 자리마다 꽃길이었다. 팔짱끼고 서로 기대어 걷는 연인의 표정이 밝고 환했다. 아빠와 나란히 달리기를 하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산책길로 경쾌하게 울러 퍼졌다. 산책 나온 강아지들도 꽃내음 맡으며 사뿐사뿐 걸었다. 우리 앞으로 펼쳐진 이 산책길 풍경을 보며 걷다가 우리들 중 한 명이 혼잣말처럼, 툭 던졌다.    



 



“우리 잘 늙어 가면 좋겠다.”



 



올 것 같지 않았던 40대를 통과한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말없이 꽃길을 걸었다.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 괜찮은 어른이 되어야겠다. 삶에서 꽃길은 이렇게 만들어질 테니까.  



 





#뜻밖의 그림자극을 만나다





한 바퀴 밤 산책길을 걷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화서공원 의자에 앉아 성벽을 바라본다. 여름까지는 초록색 억새풀이, 가을에는 달고나빛 억새꽃 무리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곳. 낮이든 밤이든. 카메라를 들이대면 작품이 될 만큼 아름답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그러다 뜻밖의 그림자극을 관람한다. 산책하는 이가 성곽을 비추는 조명을 지날 때면, 자기보다 세 배 넘게 큰 그림자가 성벽에 생긴다. 성곽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그림자극에 출연하는 배우다. 거대한 개와 산책하는 거인,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서북각루를 찍는 관광객. 성벽으로 연출되는 그림자극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하다. 거인국이 사는 나라에 와 있는 듯하다. 성벽에 달이 걸리면, 늘 걸음을 멈춘다. 서북각루와 이어진 긴 성벽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한참을 앉아서 달을 본다. 마치 달이 성벽 위를 산책하는 것 같다. 무예를 연마하던 장용영 무사가 시간을 거슬러, 성벽을 훌쩍 뛰어넘어 와 “나는 그대를 호위하는 달빛무사입니다.”라고 말할 것 같은 이곳에서, 가만히 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



 





#지상에 내려앉은 보름달을 보다





숲 향기가 점점 짙어지는 5월 밤 산책길. 연둣빛과 청록색 이파리들이 이어져 숲 터널이 된 팔달산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걷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숲 내음에 발걸음도 가볍다. 초록이 주는 힘이 있다. 팔달산 산책길에서 행궁동 동네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숲길 산책으로 몸도 마음도 산뜻해지는 날이면 종종 에둘러가는 길을 택한다. 정조대왕 동상이 있는 길로 내려와 화령전 담 길을 따라 걷다가, 달을 마주한다. 담장에 걸려 반달로 보이는 커다란 달을 따라 행궁 안으로 들어간다. 10월까지 행궁 안 밤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달빛정담’. 지상에 내려앉은, 맑고 투명한 보름달이 있다. 지안이와 할머니가 바라보았던 그 달 같은. 마스크를 끼고 달을 구경하는 사람들 표정이 즐겁다. 뒤 쪽에 서서 달을 바라보고 있으니, 생각이 많아진다. 잘 늙어가는 일에 관한 것이다. 오랜만에 ‘나의 아저씨’ ost 음악을 들으며 오늘 하루 ‘괜찮은 어른’으로 살았는지, 속에서 올라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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