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만나는 일상의 충만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만나는 일상의 충만



 



글 은정아_작가   사진 박김형준



 



 



 



흥미로운 5



 



4달째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학교만이 아니다. 시에서 운영하는 박물관도, 미술관도, 도서관도 모두 문을 닫았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일상에서 사라지자, 삶의 반경이 한없이 좁아졌다. 아이들과 집을 돌다 지치면, 마스크를 쓰고 동네를 돌았다. 그러나 쳇바퀴처럼 같은 공간을 도는 것으로는 좀처럼 삶에 윤기가 돌지 않았다. 팍팍한 시간이 쌓였고, 일상에 균열이 갔다. 우리의 삶은 단순히 ‘먹고, 자는 것’만으로는 충만해지지 않는다. 갈라진 틈을 메워줄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4월 15일 투표를 마친 뒤 아이들과 행궁동을 찾은 건,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행궁 광장에서 화성을 등지고, 4차선 도로를 건넜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해야 했지만, 오래전부터 가야지 하고 벼르기만 했던 곳에 가고 싶었다. 바로, <북수동성당>이다. 성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정조 시대에 사용했던 연자 맷돌도, 커다란 십자가도 아닌- ‘봄’ 자체였다. 성당 곳곳이 찬란한 4월의 향내로 그득했다. 저마다의 빛을 품고 서 있는 나무 사이로 햇살이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달려 반짝였다. ‘수원성지(수원화성) 도보순례의 길’ 출발점다웠다.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나 역시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나처럼 북수원성당의 고요함에 깃든 경건함을 느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아이들과 가장 먼저 간 곳은 ‘뽈리화랑’이었다. 1934년 일제강점기 시절, 한글과 우리 문화에 능했던 프랑스 선교사 출신의 뽈리 신부는 이곳에 소화학당을 설립했다. 그 후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아이들은 물론 성인, 노인에게까지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인적 없는 뽈리화랑의 내부는 평화롭고 서늘했다. 마룻바닥에서 ‘탁, 탁’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나무 창문 사이로 넓은 교실이 보였다. 교실 곳곳에 뽈리 신부와 순교자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유물과 그림 등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묻고, 이야기했다. 복도 끝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시실 외에 작은 쉼표 같은 공간도 만날 수 있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와서 잠시 쉴 수 있도록 잘 갖춰져 있다. 차와 커피 등이 놓인 정갈한 바와 말끔한 테이블이 다정하다. 우리도 잠시 그곳에 앉아 쉬었다. 잘 대접받고 가는 것 같아, 고마웠다. 



     

뽈리화랑을 나와 야외 십자가의 길로 갔다. 지중해 연안의 사암으로 조각된 14처 십자가의 길이었다. 이 조각들은 11세기 동서방 교회가 신학 논쟁으로 인해 분리되기 이전, 그리스 동방교회의 어느 무명 작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000년이 넘는 시간과 지중해 연안이라는 공간을 넘어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아이들은 쉽게 가늠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에 놀라워했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휘어진 시공간 위를 천천히 돌았다. 그 길 끝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신자를 마주쳤다. 낯선 뒷모습을 보며, 그의 기도가 그가 원하는 곳에 꼭 가 닿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북수동성당>을 나와 골목길을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알록달록한 문구가 가득하다. 80년대 초반부터 조성된 문구 거리다. 아이들의 눈빛과 손짓이 바쁘게 반짝거린다.



 



 



흥미로운 6



 



흥미로운 7



 



문구 거리는 벽화 골목으로 이어진다. 색다른 골목길을 내달리는 아이들의 발자국마다 생기가 찍힌다. 문화는 잘 관리된 박물관이나, 반짝거리는 액자로 가득 찬 미술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곱게 쌓인 곳이라면 어디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며, 마음을 열기만 해도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시간이 고인 장소에서 걷고, 듣고, 느끼는 이야기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생생한 문화다. 그 문화가 팍팍한 일상의 틈을 메워,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준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골목길처럼 말이다. 우리는 골목의 끝자락에서 <대안공간 눈>과 <예술공간 봄>을 만났다. 행궁동의 랜드마크처럼 유명한 곳이지만, 아이들과 온 적은 없다. 전시공간이 작은 미로 같다. 아이들은 공간 사이를 넘나들며 작품을 본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에게 방명록을 써보라고 했다. 고심 끝에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꾹꾹 눌러쓴다. ‘처음 왔음.’ 정직한 네 글자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이에게는 이 골목도,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미술관도 ‘처음’이다. 오늘 처음 경험한, 이 작은 전시회가 아이 속에 자라나, 큰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대안공간 눈>과 <예술공간 봄>을 나서니 조금씩 해가 지고 있다. 발걸음을 재촉해, 건너편 <행궁동 골목박물관>으로 간다.



 



골목박물관은 소소한 일상이 기록이 되고, 문화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대로 보여준다. 시집올 때 가져온 함이, 돌려서 주파수를 조절하던 라디오가, 툭하면 부러지던 아리랑 성냥이 귀한 대접을 받으며 전시 중이다. 이제는 일상에서 사라진 그 물건이 우리 삶의 역사다. 골목박물관 한쪽에는 누구나 아는 동요인, ‘오빠 생각’을 주제로 한 특별 전시도 진행 중이다. 노래 한 곡으로 시작된 전시 기획이 아동문학, 출판문화까지 뻗어나간다. 익숙한 노래의 숨은 이야기를 알게 된 어른에게도,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에게도 신선한 전시다. <북수동성당>에서 시작해 <행궁동 골목박물관>에서 끝난 오늘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문득 십여 년 전 떠났던 유럽 여행이 떠올랐다. 그곳 아이들은 동네의 몇백 년 된 건물에서 놀고, 집 앞 미술관에 가서 명화를 따라 그렸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문화를 즐기는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었다.





오늘의 내가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과거의 내가 부러워하던 그 시간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천천히 골목과 그 주변을 걸으며 공기 속에 떠다니는 문화를 숨 쉬듯 즐겼다. 삶의 문법이 달라지면서 우리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멀리 가지 않아도 좋다. 오래된 성당에서 봄을 느끼고, 색다른 길을 천천히 걷고, 골목 어귀의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문화를 느끼는 것처럼 소소한 일상을 충분히 즐기는 것. 그 속에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해 줄 비법이 있다.



 



 



흥미로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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