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 코로나19 시대의 문화변동


 



코로나19 시대의 문화변동



 



글 손이상_작가



 



 



 



흥미로운 3



 



요즘 TV드라마에 코로나19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니 이상한 일이다. 시청자들은 이 세상의 것이 전혀 아닌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 자신이 동일시할 수 있는 이야기, 우리 주변 이웃들에게 있을 법한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가. 16세기 말, 17세기 초 영국 관객들을 휘어잡은 작품들은 모두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절망의 이미지로 가득 찬 비극이었다. 그때의 관객들은 유배를 떠나는 티몬이 아테네를 향해 “흑사병의 왕관을 써라”라고 저주하는 모습에 빨려 들어갔으며 정신줄을 놓은 리어왕이 자신의 딸 고네릴에게 “흑사병 같은 타락한 피”라고 부르는 모습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가장 인기를 누린 작품 중 하나는 두 집안의 원한이 얽힌 슬픈 사랑 이야기였다. 줄리엣의 가짜 죽음을 알리는 메신저가 검역소에 붙잡혀있느라 로미오에게 서한을 전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랑을 약속했던 두 사람은 사정을 알지 못한 채 나란히 세상을 떴다.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자신이 검역대상이 되었던 일이나 사랑하는 가족 또는 친구들과 운명의 엇갈림을 겪어야 했던 일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것은 단지 슬픈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흑사병을 극복했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검역 장면은 불필요한 요소로서 축소되었다. 후손들은 옛 시대의 비극에 역병이 끼친 영향을 거의 알지 못한다.



 



16, 17세기의 흑사병 대유행은 셰익스피어의 전 생애에 영향을 끼쳤다. 고향마을 주민 네 명 중 한 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1564년 태어난 그는, 떠돌이 배우로 십여 년을 살다가, 런던 시민 열두 명 중 한 명이 사망한 1592년부터 극작을 시작했다. 그리고 ‘런던 전체가 거대한 시체 안치소나 다름없다’는 말이 있던 1603년부터 1613년까지 십 년 사이에 주요작품 대부분을 썼다. 전염을 피해 집구석에 틀어박힐 수 밖에 없었던 사정으로, 그의 손에서 명작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십 년 동안 셰익스피어의 극장은 총 78개월에 걸쳐 문을 닫았다.  햇수로 치면 6년 반에 해당하는 긴 기간이었다. 아마도 배우들은 잦은 상연 중단으로 인하여 끔찍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사회보장 제도가 전혀 없었으므로 그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며칠 붓질을 쉰 화가가 다시 자신의 터치를 회복하는 데에 그 배의 시간을 필요로 하듯이, 오랫동안 연습을 하지 못한 배우 또한 그랬으리라.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교회와 병원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폐쇄된 도시에 남은 관객들의 몫이었다. 태반이 문맹인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생활이라고는 연극밖에 없던 시절, 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 사람들의 유일한 볼거리는 죽은 이의 장례행렬뿐이었다.





예술 없는 시대의 사람들은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위로 받는 통로를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세상과 타인의 이야기를 보고 듣기를 원하며 예술작품 감상을 갈구한다. 크롬웰이 연극과 연주회를 모두 금지하자, 영국사람들은 왕정을 다시 불러오면서까지 청교도 정권을 몰아낼 정도였다. 그리하여 전염병 시대는 물론이고 전쟁이나 혁명, 대기근이 일어난 때에도, 원리주의 종교가 득세한 잠시를 제외하면 예술은 계속되었다. 예술이야말로 사회적 학습의 가장 좋은 방법이며, 나아가 우리 삶을 공동체 안에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역사를 곧잘 잊는다. 얼마나 그러하냐면, 코로나 19 대유행 같은 일을 인류가 처음 겪는다고들 말한다. 아니다. 전염병은 거의 언제나 인류의 곁에 있었다. 우리가 처음 겪는 상황은 전염병 자체가 아니라, 방역작업으로 전세계가 멈춘 지금도 접근할 수 있는 문화적 경험이 다양하다는 것이며, 그것들이 어느새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들어있음을 새삼 깨달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형극장이나 공연장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모바일 기기로 온라인 영상을 보는 시간이 극장과 공연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긴데, 이는 사실 코로나 19가 유행하기 전부터 그러했다.





이제 온라인이 문화예술 경험의 주요한 장(場)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넷플릭스는 지난 3월 말 역대 최고 트래픽을 기록한 이래 매주마다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유튜브와 아마존 프라임도 갑자기 불어난 대역폭을 감당하기 위해 비디오 표준 해상도를 자체적으로 낮추었다. 세계 주요 미술관과 극장들이 집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위해 온라인 전시와 공연을 시작했고 음악가들도 스트리밍 연주회를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한가지가 있다. ‘예술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온라인 컨텐츠에 비해 기존 예술의 영향력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유튜브에 올라온 이름 높은 극단의 최근 공연 조회수보다 어느 농부 아저씨가 두더지 잡기에 실패하는 영상의 조회수가 수천 배나 많다. 이미 온라인 미디어에는 저만치 먼 이야기로 여겨지는 예술에 비해 진짜 현실을 다루는 컨텐츠들이 있다. 고전예술의 기능이 카타르시스, 영혼의 씻김에 있다고 한다면, 이제 그 기능조차 평범한 사람들의 개인방송이 급격히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얼마 전 전세계에 중계된, 인공호흡기를 꽂은 코로나19 확진 환자의 셀프 영상을 보라. 임종 전에 가족을 만날 수도 없다고 울먹이며 자가위생을 당부하는 모습은 어떠한 비극작품보다도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가? 또 외출이 통제된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서 촬영된 영상도 있다. 공룡옷을 입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사람이 그를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엉덩이를 씰룩이며 달아나는 모습은 어떠한 희극작품보다도 우리의 현존재를 내보이고 있지 않은가?





문화적 경험이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그럼에도 시민들이 셰익스피어의 새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던 흑사병 시대와 달리, 코로나 19 시대의 문화변동은 예술의 지위와 역할의 재검토를 부른다. 하루 스무 명도 방문하지 않는 전시공간에 최대한 보기 불편하도록 설치한 영상은 손쉽게 예술의 지위를 획득하지만 같은 영상을 수만 명이 볼 수 있게끔 온라인에 공개한 경우 예술경력 증명조차 받을 수 없는 모순이 있다. 한편으로는 예술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것들이 기존 예술의 역할을 일부 대체하고 있으며 뒤늦게 온라인에 진입한 예술작품의 대중적 영향력은 이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현실이 있다.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 처음으로, 적어도 셰익스피어 이후로는 처음으로 공연예술의 필요성을 덜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프라인 공간에 많은 인원이 모여 예술작품을 관람하는 이전의 문화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공감 가능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공동체 안에 응집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공동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또 우리의 이야기를 반영하는 것은 무엇인가? 온라인 미디어 컨텐츠가 그러한 역할을 이미 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온라인 미디어와 예술의 본질적인 차이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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