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호 예술가여, 질주를 멈춰 세워라 - 라원식 · 고영직 대담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숨막히게 달려왔는지 생각해봅니다.



세상의 종말은 늘 우리 발끝 앞에 와 있습니다.



예술이 어떤 고민과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지 들어봅니다.



 



글 조동흠_더페이퍼 편집부장 일러스트 최정원



 



 





 



좌: 고영직(고). 문학평론가                                                                           

우: 라원식(라), 미술평론가, 본명 양원모



 



 



 



누구나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Q   극복되지 않을 것 같은 코로나와 함께 생태적인 문제를 안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과 공동체라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들어보려고 두 분을 모셨어요.





  사회적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아지고 장시간 홀로 있는 시간들이 많아졌죠. 어머님께서 몸이 급격히 쇠약해지셨어요. 오랜 친구들과의 왕래도 뜸해지니 마음도 가라앉고, 참 쉽지 않은 기간이죠.





  저는 코로나19 이후에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제가 백무산 시인의 근작 시집에 해설을 썼는데, 「정지의 힘」이라는 시가 크게 다가왔어요. 지금 우리는 멈춤의 시간을 살고 있잖아요. 산업이 멈추고 일상이 멈춘 시기에 그 ‘정지의 힘’을 제대로만 배울 수만 있다면, 코로나19가 앞으로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나면 우리 일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자연생태학, 사회생태학, 마음생태학, 이 세 가지 생태학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지금 코로나19의 문제는 자연생태학의 훼손, 파괴, 황폐화와 관련이 있겠죠. 그런데 세 가지 생태학 중 지금 마음생태학이 가장 건강하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되죠.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 차원에서 정지의 힘을 배워 삶의 전환, 사회적인 전환의 계기로 삼을 수만 있다면 아주 쓴 약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질주 끝에 공동묘지가 있다





Q  코로나 때문에 환경 문제가 크게 이슈가 된 거 같아요. 그렇다고 일회용품을 전면 금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2015년 5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황이 된 후 제일 먼저 환경 회칙을 발표했어요. 고영직 선생님이 세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교황님은 그걸 더 세분화했어요. 인류의 각성 또는 회심이 필요한 시기고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가치관, 세계관을 구성하던 태도들을 전환할 필요가 있어요. 생태적 차원의 새로운 형제애가 있을 때만 타개책을 찾을 수 있겠죠. 지구상에 존

재하는 많은 뭇 생명들까지 형제애로 이해해야 하고요.

생태적 감수성을 가지고 공명하고 생태적 수행과 성찰을 하며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조화와 균형으로 통합해낼 공동의 집단지성이 발휘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냐는 말씀을 하셨어요. 아마 이 코로나19는 다른 양태로 계속 오게 될 거고 근원적 해결책으로 지구적 차원의 실천이 필요한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력감에 빠져들 수가 있죠.



 



  올림픽 구호가 ‘더 더 더’잖아요.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무슨 음주 측정하는 거 같아요.

어떤 삶의 양태는 더 많이 소유하고 성장하는 부가 아니라 ‘덜 덜 덜’로 가야 되겠죠. 『9월이여 오라』를 쓴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어느 에세이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공동묘지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고 썼어요. 각성이나 회심 같은 게 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건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싶고요. 위기의 순간일수록 철학자나 시인이 되려는 심리가 있다고 봐요. 이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때 문화·예술의 힘이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재미나 웃음을 잃지 않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의 자유, 법 아래에서 평등, 경제적 박애





  녹색운동의 비조 루돌프 슈타이너 선생은 예술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했는데, 삼원주의 운동을 주창해요. 근대사회의 시발점이 시민혁명이잖아요. 시민혁명에서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웠는데, 슈타이너 선생은 자유의 영역은 문화와 예술의 영역으로,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문화예술의 자유여야 한다고 말해요.



그 다음 평등은 법과 정치의 영역이라고 말해요.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박애는 의외로 경제영역에 있어요.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하나예요. 상호 호혜적 관계 속에서의 배려와 박애정신으로 풀어야 한다는 거죠. 



자본주의가 이야기하는 자유는 사실 전부 시장과 관련되어 있어요. 사회주의자들은 평등을 강조했죠. 그 평등 역시 경제와 직접 관련이 있어요. 앞으로 경제영역에서 박애 정신이 강조되지 않으면 마주할 큰 난제들을 해결하기 쉽지 않겠죠.

특히 위기의 상황에 오게 되면 위기의 공동체라는 게 등장해요. 고난의 공동체라고도 하죠. 고난의 공동체가 등장하면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돌변할 것 같지만, 큰 지진이나 5.18 같은 경우를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이타적으로 바뀌었어요. 오히려 희망을 북돋고 서로 격려하며 치유되는 거죠. 그때 가장 경계해야 되는 건 고난의 상황을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세력들이죠.





  재난 상황에는 ‘지금’을 배우는 게 가장 중요해요. 대한민국이라는 커뮤니티가 위기와 회복의 기로에 서 있는 거 같아요. 제가 특정 종교 신자는 아닙니다만, 철학자 이반 일리치 선생 얘기 중 인상적이었던 게 포도밭 이야기였어요.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5만 원 주고, 점심 때 와서 일한 사람도 5만 원 주고, 일 끝나기 한 시간 전에 와서 일한 사람도 5만 원을 준다는 것이죠. 이게 하늘나라 셈법이라는 것이죠. 요즘 기본소득 논의와 통하는 대목이 있는 것 같아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기본소득은 그리스도적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방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인간중심적이잖아요. 코로나19가 오기 전에 호주에서 산불로 10억 마리의 동물이 죽었죠. 지금도 브라질 정부에서 아마존 밀림훼손을 방치하고 있고요. 어떤 의미에서는 코로나19 발생원인에 더 가까운 것들이죠. 야생동식물의 서식지 축소와 파괴, 생물 종간 거리두기 실패 ! 인간의 공존·공생 못지않게 다른 생명들도 공존·공생할 수 있게끔 확장된 인식과 배려가 필요해요. 돼지열병이 터지면 모든 돼지를 살처분하죠. 조류독감이 유행하면 오리부터 닭까지 다 살처분하고요. 지금의 과학기술이라면 동물 백신을 개발할 수 있을 텐데. 이게 안되는 게 하늘나라 셈법이 아니라 경제적 계산법이거든요.

한국은 코로나19의 모범국이나 국제적 차원에서 본다면 생태문화적 숙성은 많이 더디죠. 뭇 생명과의 공존과 공생을 위해서는 확장된 생태적 형제애로 나아가야 되는데 거꾸로 증오와 대립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어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죠.



 



 



 





 



 



 



위기 앞에 누구나 시인이 된다. 행동하는 예술/나우토피아가 필요할 때





Q  지금 포스트 코로나든 위드 코로나든 이런 현상들이 왜 일어났을까 생각하고 그 앎이 사람들에게 전파가 되어야 하는데



 



  철학의 기본 모토를 보여주는 라틴어 표현이 있는데 “감히 알려고 하라”예요. 우리가 생명체에대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로 ‘살처분’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희생되는 개체에게 일말의 존경심도 없는 거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쓰는 언어가 우리의 병든 마음과 정신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죠. 그 언어를 새롭게 환기시키기 위해 시인의 역할이 중요하죠.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있든 시민사회 등에 새로운 ‘언어’가 없어요. 대부분 수축사회가 아니라 팽창사회에 대한 패러다임에 갇혀 있고요. 그걸 깨기 위해서는 우리 삶이, 우선 내 일상이 좀 달라져야죠. 제로웨이스트 같은 방식을 내가 일상적으로 실천한다든가 해야죠.





  2020년 한국에서 ‘생명평화 미술행동’이 일고 있는데, 울산에서부터 시작해 부산을 거쳐 부안새만금까지 올라오고 있어요. 네트워킹을 통해 공동의 과제를 함께 성찰하고 따로 또 같이 자기표현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이런 것에 공감하는 사람은 전체 사회 구성원의 극소수예요. 확장이 필요한데, 왜 확장이 되지 않는가?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며 국가를 일구고 민족을 이루며 지구 시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통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돼요. 공유지식이요. 그 기반 위에서 인류는 공동선과 공공미를 지향했죠.

앞으로 코로나가 미칠 영향력을 예상해 본다면, 아마 세계 3차 대전과 대공황을 합친 것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세계사적 사건이 되겠죠. 68혁명 못지않은 정도의 계기점이 될 수도 있겠죠. 이걸 통해서 예술도 근본적으로 바뀔 거예요. 포스트모더니즘(후기 근대 예술)에서 탈 후기 근대 예술로 가려면 공통진에 기초한 통합학문이 필요해요. 인류,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공존·공생하기 위해서는 공통분모로써의 참, 회통하는 진리가 있어야 하죠.

지금은 현장으로 가야할 때라고 생각해요. 인천 아트플랫폼에서 작품을 봤는데, 커튼에 붉은 도장으로 번호를 다 찍어놨더라고요. 000001, 000002 이런 식으로요. 멀리서 보면 거의 핑크빛 커튼이에요. 이게 돼지들을 살처분하면서 찍은 넘버를 20만 개 찍은 거예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작가주의 예술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행동주의 예술이 더 필요할 때예요. 특히 고난과 위기의 공동체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 예술이 요구되고 필요하다고 봐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지만, 공통의 어떤 진리·진실을 표방한다는 것은 자칫 자기 회의 없이 과도하게 어떤 신념이나 확신을 일반화하면 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코로나19 상황 이후의 상황을 표현하는 문학작품들이 있긴 해요. 이영광의 「검은 봄」이 떠오르네요. 이태 전에 작고하신 허수경 시인은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2011)에서 이렇게 지구와 자연을 착취하며 지탱되는 석유문명이 과연 온당한 것이냐, 이게 지속가능한 것이냐, 뜨거운 격문의 문장으로 썼지요. 코로나19 시대에 이렇게 묻는 발언들이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보고요. 응당 말씀하신 것처럼 행동주의적인 예술작품도 당연히 나와야 되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에 구현하려는 유토피아로서의 나우토피아(nowtopia), 그런 작품들이 좀 나와야 된다고 봅니다.

제가 십여 년 전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갔을 때 라말라라는 도시가 텔아비브에서 그 전날 나이트클럽에서 자살 폭탄사고가 터져 완전히 봉쇄됐어요. 8미터 높이의 분리장벽을 보는 순간 ‘와, 진짜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느꼈어요. 그 벽을 보는 순간 평소에 내가 시인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닌데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겠다는 어떤 절박한 문제의식 같은게 생기더라고요. 지금 시대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더듬이나 촉수를 뻗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어떤 문제의식을 더 날카롭게, 더 깊게, 얕은 생태학이 아니라, ‘깊은 생태학’으로 재밌고 유쾌하게 표현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새로운 예술을 위하여





Q  지금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기르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줘야 될 것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지금 코로나19 같은 비상상황에서 생존의 위기도 있고 창작의 위기도 있는데, 심폐소생술(cpr)하듯이 지금 당장 생존의 위기 상황에 몰려 있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어야겠죠. 다만 창작지원정책 같은 경우에는 적은 돈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통해 과감하게 줘야겠죠. 재원도 더 끌어들이고. 가장 큰 문제가 정부에서 내놓는 정책에 문화예술인들의 목소리가 하나도 없어요.

창작 지원정책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의 빈곤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사회가 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거잖아요. 예술의 역할은 그런 점에 있는 건데, 너무 관행적으로만 정책을 시행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새것을 만들려면 기존 문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데, 행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려는 시선에 익숙한 것 같아요. 최근 무슨 글을 한 편 썼는데 거기 쓴 글 제목이 「태초에 행정이 있었다」에요. (웃음) 이제는 이런 발상에서 과감히 벗어나야죠.



 



  저는 시각예술 분야에서 미디어아트 같은 경우 지금 유튜브로 건너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작권은 충분히 보호되어야 하죠. 백무산님의 시(詩)도 더 적극적으로 유튜브에 떠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글로벌 초연결사회이거든요.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어요. 앞으로 한국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질 거라고 봅니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돼서 예술 사전사후 검열이 다 없어졌잖아요. 그리고 경계들이 많이 무너졌죠. 파인아트과 대중예술의 경계도 무너졌고, 한국 드라마에는 사회성이 짙은 드라마가 많고. 인간에 대한 이해도 갈수록 깊어지고 있어요. 한국 사회참여예술의 전통이 나름 배면에 깔리면서 역할을 한 것들이 있어요.

동서고금의 문화자산을 활용하여 그것들을 가로지르며 새롭게 녹여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이를 통해 새로운 예술, 생태문명으로의 대전환을 촉진하는 예술, 이른바 탈후기근대예술, 포스트포스트모던아트의 최전선이 우리나라, 한국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지혜를 모아 위기상황의 지구적 난제를 타개하는데 예술적 상상력과 사회적 창의력이 한몫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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