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호 트로트 붐 - 저질과 고질의 차이?


트로트 붐



저질과 고질의 차이?



 



글 손이상_작가



 



 



 



 



 



70년대 음악다방에서 유행했던 마멀레이드(Marmalade)의 ‘내 삶의 반성 (Reflctions of my life)’이라는 노래가 있다. 재작년 KCC 60주년을 알리는 TV광고에 삽입됐다. 광고는 이렇다. 기업의 역사를 보여주며 뭔가 감동적인 것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배경에 “내 설움들, 슬픈 내일들 (All my sorrows, sad tomorrows)”이라는 노랫말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뒤로 이어지는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Feel I’m dying, dying)”라는 가사가 나오기 전에 광고가 끝나니 그나마 다행이다.



 



어느 강의에서 이 광고와 노래를 틀어주고 무슨 느낌인지 물은 적이 있다. ‘감미롭다, 차분하다’에서부터 ‘감동적이다, 힘이 난다’ 같은 대답도 나왔다. 한국어로 번역한 가사와 함께 노래를 다시 틀어주었다. 청중들은 이 노래가 삶의 의지보다는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하고 인생의 실패를 암시하는 내용임을 쉽게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슬픔, 비통함같은 감정이 든다고 한 사람은 끝내 아무도 없었다. 인류의 공통감각으로는 청승맞다고 느낄법한 노래다. 한국인은 유달리 이런 노래에 친숙함을 넘어 편안함을 느낀다. 나아가 씻김=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혹자는 이렇게 통하는 음악을 가리켜 ‘뽕끼가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뽕끼’의 특징으로 콧소리 섞인 창법, 통속적인 멜로디 등을 꼽기도 하는데, 사실 ‘뽕끼가 있는’ 노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서 분명하게는 정의하기 어렵다. ‘뽕끼’란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수용자가 음악을 받아들이는 정서다. 어딘지 모르게 애달프지만 비애감이 들지는 않는 정도로, ‘감미롭다’에서 ‘힘이 난다’까지를 포괄한다. 이때 ‘어딘지 모르게’가 중요하다. 어딘지 모르게 짝짝 맞는다는 뜻의 한국어 ‘구성지다’는 정규교육을 받은 음악가의 곡을 말할 때는 쓰이지 않는다.





한때 라디오만 틀면 흘러나오던 리알토(Rialto)의 노래도 ‘뽕끼’가 있었다. 영국에선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리알토는 90년대 한국에서 톱스타 수준의 인기를 누렸다. 또 밀레니엄 이후엔 구라모토 유키(‘구라모토’가 성인데도 한국에서는 대개 ‘유키 구라모토’라고 부른다)의 피아노 곡들도 그랬다. 국내 음반판매량 1위를 차지하고 내한공연 티켓은 10분만에 매진될 정도로 ‘톱 뮤지션’이었던 구라모토는 정작 일본에선 주점과 웨딩홀을 전전하는 무명 연주자였다. 그들 모두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음악가가 아니었다.



 



이처럼 해외의 평가에 비해 국내에서 유독 사랑을 받는 음악이 있다. 해외 음악가들의 내한공연을 주관하는 공연기획자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뽕끼’ 있는 음악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해요. 저평가되어 있으니까 섭외비가 싸죠. 그럼에도 내한공연을 열면 크게 성공합니다.” 그리하여 지난 몇 년 사이 혼네(Honne)나 프렙(Prep) 같은 밴드들이 수차례 한국을 다녀갔다. 둘 다 첫 내한 때만해도 거의 완전한 무명이었으나 그야말로 객석이 가득 들어찬 대박을 쳤다.





왜 한국인이 ‘뽕끼’를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나이가 오십쯤 되면 면상이 두꺼워져서 분단의 아픔이나 정치상황을 들먹이며 말을 지어낼 수도 있으련만, 어느 나라든 선호하는 음악이 약간씩 다른 것처럼, 우리의 취향도 그러할 따름이다. 근원적인 이유는 몰라도 현상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국내 음악시장 한쪽에는 교육되고 권장되는 음악(이를 테면 클래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대중 사이에 유행하는 음악이 있다. 그 외 인디음악이나 종교음악 등등도 있겠지만 이것들은 여전히 시장 바깥에 존재한다. 결국 크게 보아 권장되는 음악과 유행하는 음악이 대부분인 셈인데, 국내의 음악 향유자들의 욕구를 이 둘로는 다 채우지 못한다.



 



그런데 요 1년 사이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지방행사 무대로 밀려났던 트로트가 TV의 저녁시간 메인 프로그램에 나오더니, 이제는 국가 지원사업 대상으로도 오르기 시작했다. 트로트 붐은 ‘뽕끼’의 귀환이다. 이별노래나 심지어는 한국전쟁의 아픔을 다룬 노래까지도 웃으면서 박수를 치며 따라 부른다. 높은 시청률을 보이는 TV 트로트 프로그램과 높은 음원 판매량은 대중의 실제 선택을 증거한다. 최근의 이런 기류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면을 통해 발화되는 지식층의 평가는 야박하다. ‘뻔하고 퇴행적이어서 듣기에도 민망하다’(이주엽, “성인가요의 미학적 파산”, 한국일보)거나 ‘경청·감상의 대상이라기보다 여흥과 오락거리에 가깝다’(양성희, “트로트 열풍과 반엘리트주의”, 중앙일보)는 등 비판일색이다. 이 열풍 자체가 종편채널에 의해 인스턴트 식으로 조성된 것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고, 한몫 잡으려는 방송사들이 비슷한 프로그램을 내놓는 통에 피로감을 느낀다는 의견도 있다.





지난 봄에는 문화부가 청소년 트로트가요제 사업공고를 냈는데 오페라 페스티벌의 지원규모를 줄인 시점에 나온 공고였기 때문에 클래식 팬들의 반발이 심했다. 저질 트로트 사업을 당장 중단하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면 저질이라는 트로트의 가사는 어떠한가. “아픔을 달래는 여자, 고개 숙여 우는 여자, 이 세상에 약한 것이 여자여자여자”(설운도, ‘여자여자여자’). 그렇다면 고질이라는 오페라 가사도 들여다보자. “이 여자 저 여자 다 똑같네, 다 똑같이 아름답지, 아무리 잘난 여자도 날 거절 못하네, 모든 여자는 다 아름답지”(베르디, ‘이 여자 저 여자’).



 



둘 다 몹시 속되다.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 오페라도 본디는 대중음악이다. 노래 하나하나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트로트와 큰 차이가 없다. 단 하나의 차이는 베르디 노래에서 대상화 된 여성은 잘났고 아름답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고 설운도 노래에서 대상화 된 여성은 아프고 울고 약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즉, ‘뽕끼’의 차이다. 애처로움을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이런 예는 베르디의 ‘축배의 노래’와 편승엽의 ‘찬찬찬’을 비교했을 때, 그리고 베르디의 ‘여자의 마음’과 장윤정의 ‘어머나’를 비교했을 때도 똑같이 나타난다.





현재의 트로트 붐은 향유자들의 선택의 결과다. 이 선택은 클래식이 너무 엄숙하고 대중음악은 K-팝이라는 세계음악이 되어 떠나간 탓에 일어난 것으로, ‘뽕끼’의 욕구를 채우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트로트가 아니라 외국곡이나 피아노 연주곡이어도 ‘뽕끼’가 있으면 인기를 얻는다. 트로트여도 그 정서가 없는 노래는 오디션에서 잽싸게 탈락한다. 그러고 보면 트로트 비판도 사실은 ‘아프고 울고 약한 대상’을 좋아하는 ‘뽕끼’의 정서에 대한 비판이 아닌가. 한국인이 왜 이런 정서를 유독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단지 현상이 이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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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님2023-11-02 10:12:46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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