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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소소한 만남1 울림이 있는 삶 - 그린 디자이너 윤호섭
everyday earthday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윤호섭 교수의 그린캔버스 작업실에 들어서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초록색 잎사귀가 그려진 티셔츠에서부터 박스로 만든 의자, 소똥 덩어리, 종이를 이어 붙여 만든 달력 등 온갖 물품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가짓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이 작품들은 모두 지구의 건강을 위해 디자인된 작품들이다.
Writer 백미희 Photo 김오늘
삶을 바꾼 질문을 만나다
윤호섭 교수는 한창때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디자이너’였다. 디자이너로서 광고계에 입문한 뒤 1970~80년대에는 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 잼버리 대회, 광주 비엔날레 등등 굵직굵직한 각종 국제행사의 디자인에 참여했다. 그런 그가 ‘그린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 것은 한 청년과 만남 덕분이었다.
1991년, 제17회 세계 잼버리대회에 참여한 윤 교수는 사인을 받으러 온 어떤 일본인 대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가 환경과 디자인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평소 환경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을 계기로 환경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문제의식 또한 가지게 되었다. 이 인연은 30년이 넘게 이어져 두 사람은 지금도 환경과 사회 에 관한 여러 정보를 교류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동지가 되었다.
“일본 호세이대학의 환경미술동아리 회장인 청년이었는데, 잼버리대회에 고 래잡이 금지를 위한 부스에 참가했더라고요. 원래도 미술과 환경에 관심이 많 은 친구였는데 제가 참여한 포스터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질문을 던진 거였 어요. 덕분에 자료를 찾아보면서 환경문제의 실상을 알게 됐지요.”
당시 국내에서도 환경문제에 의식을 가진 이들은 있었지만 그리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디자이너로서 윤호섭 교수는 작품을 통해 환경에 울림이 있는 삶 대한 화두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환경’을 주제로 활발한 작품 활 동을 펼치는 동시에 국민대학원에 그린 디자인 관련 강의를 개설하기도 했다. 실제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냉장고를 없앴다. 다른 것들을 콘센 트를 켰다 껐다 할 수 있지만, 냉장고는 24시간 돌아가기에 과감하게 없애버 렸다. 현재 작업실에도 태양광 패널이 설치되어 대부분 자체 생산한 전기를 사용한다. 차도 없애고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
2000년 열린 첫 개인전의 포스터만 봐도 환경에 대한 그의 생각과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포스터 속에는 돌고래 위에 사람이 서 있고 그 위에 도요새가 자리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생태권의 중요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하나 의 생태 축으로 구성해 나타냈으며, 돌고래는 수권, 사람은 지권, 도요새는 대 기권을 상징한다. 그는 포스터를 인쇄하지 않고 신문지 위에 직접 수백 장을 그렸다. 발행 부수를 과장하기 위해 수만 부를 인쇄해 곧바로 파기하는 유명 일간지들의 야만적 형태를 지적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게다가 이 작품을 전시 할 때 받침대로 썼던 박스는 지금도 그의 작업실에서 의자로 활용되고 있다. 골판지 박스를 여러 장 끈으로 엮어 만든 방석인데, 그도 이 받침대를 20년이 넘게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고. 이외에도 작업장에는 100% 자연농업을 실천하는 평화나무농장의 ‘소똥’, 해외 한 유명 브랜드의 전시회 이후 버려진 옷으로 만들어진 가방 등 그 의미를 알면 고개가 끄떡여지는 그린 디자인 작 품들이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다.
다음 세대에 ‘그린’이라는 울림을 전하다
2002년부터 매주 일요일이 되면 윤 교수는 인사동 거리로 나갔다. 친환경 초 록색 페인트로 옷 위에 그림을 그려주는 티셔츠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서다. 코로나 19로 인해 현재 티셔츠 퍼포먼스는 중단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특강 때 만나는 유치원,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선물 하기 위해서다.
“예전에 교육연수원에서 특강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수업을 들었던 선생님들 이 종종 학교로 저를 초청해 주십니다. 환경과 관련된 살아 있는 이야기를 아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것이죠. 미래의 주역이 될 아이들을 직접 만나고 지구를 위한 울림을 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회입니까. 요즘 아이들과 만나는 수업은 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시간 중 하나입니다.”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 되면 꼭 소화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장 지오노가 슨 프랑스 소설 을 필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홀로 수십 년 동안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거대한 숲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인데, 책 내용을 그냥 읽고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가 몸을 거쳐 몸으로 스며들기 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주는 과제라고. 그런데 아이들이 보내오는 과제를 볼 때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는 한다. “이것 좀 보라.”며 두툼한 봉투를 들고 온 윤 교수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이면지와 포장지, 우유갑 뒤편에 빼곡 하게 필사한 내용을 보여주었다.
“유치원생, 초등학생 아이들이 종이를 아끼겠다고 아주 작은 글씨로 재활용 지를 가득 채워옵니다. 한 아이는 우유갑을 뒤집어서 거기에 필사했는데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윤 교수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그린캔버스(www.greencanvas.com)’에는 최근 에도 이 학생들의 글이 올라와 있다. “언제부터 필사하셨어요?”, “티셔츠 고맙 습니다. 잘 입을게요.”라는 그는 글 하나하나에 댓글을 달며 세대를 뛰어넘는 교감을 나눈다.
“제가 온 것을 알면 손자뻘 되는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달려옵니다. 앞으 로 다음 세대를 이끌 미래의 주역들과 ‘환경’이라는 주제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랍고 소중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 지니 자연스레 가족들도 함께 주의를 기울이게 되지요. 얼마 전에는 한 아이 의 할머니께서 자발적으로 을 필사해서 보내주셨습니다. 환경에 대한 울림이 사람과 사람을 거쳐 널리 퍼져나가는 것이죠.”
모두가 푸른 싹을 틔울 그 날을 꿈꾸다
한편 지난 2월, 수원시는 환경컵 ‘큐피드Cupid’ 사용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기 위해 카페에서 음료를 포장 구매할 때 일회용 컵 대신 수원 시가 제작한 다회용 텀블러 큐피드를 사용하는 것이다. 캠페인 참여 카페에서 는 음료를 포장, 구매한 손님에게 큐피드에 대해 안내하고, 사용을 원하는 손 님에게 1,000원에 텀블러를 판매한다. 그 큐피드를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방문할 때 가져오면 무료로 입장하는 이벤트 또한 함께 진행했다. 환경컵 큐 피드 앞면에는 잎사귀 로고가, 뒷면에는 ‘everyday earthday’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바로 윤 교수가 디자인한 로고와 문구다. “처음 수원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쓰레기 봉지를 새롭게 만들어 보고 싶다 는 제안을 받으면서부터예요. 단순히 디자인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소재부터 환경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프로젝트는 실 현이 되지 않았지만, 현재 수원시 텀블러에 그 쓰레기 봉지를 위해 그렸던 로 고가 들어 있습니다.”
큐피드 뒷면에 적힌 ‘everyday earthday’라는 문구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바로 earthday의 ‘art’ 부분에 밑줄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윤 교수 가 평소 슬로건으로 사용하는 문장인데, 2000년 개최했던 첫 개인전의 포스 터에도 이 문구가 적혀 있다. 실제 생활에서 환경보호를 실천하고 그린 디자 인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의 의지가 담긴 슬로건이기도 하다.
현재 윤 교수는 8월에 진행될 준비에 한창이다. 2008년부터 매년 여름이 되면 동료 그린 디자이너, 후배, 시민과 함께 녹색 지구를 위한 전 시 을 개최하고 있다. 회화, 조형물, 사진, 영상 등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한다.
한 청년과 만남을 계기로 환경에 대한 의식을 깨우친 윤호섭 교수. 그는 계속 해서 주변과 교류하며 작품, 강의, 생활을 통해 자신이 받은 울림을 전하고 있 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울림은 더 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 푸른 싹이 돋아날 때까지.
윤호섭 교수가 그린, 그린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과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
윤호섭 교수가 그린, 그린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과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
초등학생이 직접 필사한 . 종이를 아끼기 위해 깨알 같은 글씨로 우유갑 뒷면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