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은 기존 성들이 안고 있었던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건설된다. 동서남북 사대문을 건설하면서 모두 옹성을 설치하였고, 적재적소에 치성을 두었으며, 여장의 높이를 높여 군사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이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밝힌 조선 성들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요소요소에 암문을 설치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하였고, 남북 수문을 두었는가 하면, 군사적인 위엄을 담은 장대를 동서에 건설했다. 치성(雉城)의 제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치성은 성벽을 중간중간 돌출시켜 쌓은 것을 말하는데 꿩이 제 몸은 감추고 남을 잘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러한 치성이 없거나 적당한 장소에 있지 않으면 적군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파괴하기 쉽다. 과거의 성들에도 치성이 있지만 그 활용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수원화성에 건설된 치성들은 다각도로 모색되었다. 순수하게 치성의 역할만으로 건설되기도 하고, 대포를 장치하는 포루(砲樓)를 겸하거나, 치성 위에 집을 지어 군사를 보호하려고 한 포루(鋪樓)도 있다. 성의 동남쪽, 서남쪽, 서북쪽, 동북쪽에는 모두 각루(角樓)를 두었다. 이는 수원화성의 다섯 군영 체제를 보완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에 중영(中營)(신풍위;新風衛)을 두고 동에는 창룡위(蒼龍衛), 서에는 화서위(華西衛), 남에는 팔달위(八達衛), 북에는 장안위(長安衛)를 두었는데, 중간의 요소에 네 각루를 두어 각 위(衛)를 보충해주는 동시에 부장(副將)이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각 각루의 위치는 빼어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휴식 공간으로써의 역할도 컸다고 보여진다. 그 중 제일은 동북각루인데 용두각으로 불리기도 하는 방화수류정이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정자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다고 할만한 정자인데 동북각루라는 집 이름이 말해주듯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세워진 시설이다. 적군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져 있을 때, 마루 밑의 총구와 포구에서는 사정없이 불을 뿜을 것이다. 수원화성 봉돈(烽墩)은 단순한 봉수대의 역할을 뛰어넘은 요새다. 우선 봉돈 자체가 하나의 치성으로 쓰이며, 많은 총구를 뚫어 자체 방어력을 갖추었으며, 화성행궁과 서장대를 마주보며 국경과 해안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수원화성의 건설에서 벽돌의 사용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북학파 실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벽돌집의 제도를 조선에 이식시키는 과정이 수원화성에 담겨 있다. 성의 중요 시설물은 대개 벽돌을 활용하였고, 건축물의 일부분도 벽돌로 쌓았다. 그래서 수원화성을 축성 재료로 분류할 때 다른 곳에는 없는 석전교축(石塼交築)의 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원화성의 평면은 나뭇잎을 닮았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순응하며 성을 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조의 애민정신에 의한 성의 확장으로 인해 더욱 완벽하게 나뭇잎을 닮았다. 수원화성은 여러 기능들을 한 시설물에 복합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다기능을 강조하면 외형을 놓치게 되고, 외형을 강조하다 보면 기능성에 문제가 있게 된다. 이 배반적인 요소 둘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힘은 문화적인 능력이 탁월했을 때 가능하고, 탁월한 문화적 능력은 튼튼한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수원화성은 이렇듯 조선의 정점에서 건설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