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초만 하더라도 수차례의 암살 기도에 내몰리기도 했던 정조 임금이 즉위 20주년을 맞아 보란 듯이 7천 명에 가까운 행렬을 거느리고 생부인 사도세자(정조 즉위 후 장헌세자로 추존함)가 묻혀 있던 화성을 찾는 길이었다.
1795년은 동갑내기이던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 정조는 생부의 원소가 있던 이곳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을 위한 성대한 잔치를 계획하였다. 33년 만에 어머니에게 남편의 무덤을 참배하게 하고 어머니 집안의 친인척들을 모아 회갑연을 베푸는 것이었다. 마침 한 해 전부터 건설에 들어가 위용을 드러낸 화성의 모습을 내외에 과시하기에도 안성맞춤인 때였다.
직접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행차인 만큼 그 준비도 철저했다. 화성 건설 대역사를 총괄하던 총리대신 체제공을 비롯하여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주축을 이룬 정리소를 전담부서로 설치하여 행사를 관장하게 했다. 한강에는 배다리(舟橋)를 건설하고 혜경궁이 타고 갈 가교(駕轎)도 새로이 제작했다. 무엇보다 뜻깊은 것은 이 행사가 철저하게 백성과 함께 하겠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 위에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예산의 집행과 행사 기획 곳곳에 정조 임금이 특별 지시한 여민동락의 정신이 구현되었다. 왕권의 강화가 자신을 괴롭히던 신권을 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하기 위한 것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어심이 그대로 드러난 쾌거였던 것이다.
1795년 윤2월 초 9일 7시경에 정조는 혜경궁을 모시고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배다리를 건너 노량의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만안현을 넘어 문성동(文星洞) 앞길에서 잠시 휴식한 후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 날, 이른 시각에 출발하여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길을 떠나 오후에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셋째 날, 공자의 사당(聖廟)에 참배하고 화성·시흥·과천지역 백성을 대상으로 문무과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봉수당에 나아가 이틀 뒤에 있을 진찬 예행연습에 참여하였다. 넷째 날,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을 참배하고 오후에 서장대에서 군사훈련을 점검하였다. 다섯째 날, 봉수당에서 혜경궁에게 진찬을 올렸다. 여섯째 날, 신풍루에서 친히 백성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 주고 오후에는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일곱째 날, 화성행궁을 떠나 시흥행궁에서 하룻밤 묵고 여덟째날 환궁하였다.
이 모든 과정은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화성에서 거행된 각종 행사는 8폭 대형 병풍 《화성원행도병》으로 기록되어 오늘날에도 당시의 행사 장면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또한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도 그림으로 시각화되었다. 성대한 행사 기록화와 목판으로 인쇄된 의궤의 각종 그림들은 조선시대 왕실 기록화의 역사를 새로 쓰는 신기원을 이룬 것이기도 하다.
창덕궁에서 화성행궁까지의 거리는 63리(당시의 10리는 오늘날의 약 5.4㎞)였고 화성행궁에서 현륭원까지는 20리였다. 실제 행차에 참여한 인원은 어느 정도였을까? 원행에 앞서 윤 2월 3일 정리소에서 아뢴 바에 따르면, 원행을 수가할 군사는 어가를 호위할 군병 2380명, 화성에서의 군사훈련에 참여할 군병 3700명, 각 군영의 수하병사 1000여 명을 합하여 6900명이었다. 여기에 혜경궁의 회갑연에 초대된 내외빈과 각사의 관원이 추가되어 실제 배종한 인원은 7200여 명에 달하였다.
성대한 행차 장면은 《화성원행도병》 중 2폭,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와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에 묘사되어 있다. 화성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시흥행궁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환어행렬도〉는 1㎞가 넘는 장대한 행렬을 지그재그 식으로 상하 긴 화면에 압축하여 묘사한 것이 일품이다. 행궁에 막 도착한 선두 행렬이 주변에 대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고 기마대와 대기치들을 앞세우고 혜경궁의 가교와 말을 탄 정조 임금, 그 뒤로 수가하는 행렬이 아스라이 이어져 있다.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 연도에 가득 밀집한 백성들, 정연한 대오를 갖춘 행렬이 장대하게 묘사된 그림이다. 〈한강주교환어도〉는 총 36척의 배를 연결하여 만든 배다리의 모습이 특별히 부각되어 있다(도 2). 어머니를 모시고 행차하는 왕의 행렬은 당시 백성들에게 굉장한 볼거리였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관광민인들을 이 역사적인 현장에 이들을 동참시키고자 한 통치자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원행반차도〉, 규장각소장 〈화성원행반차도〉,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가 그것이다. 이들 행렬도에는 병풍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대열편성 상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화성원행반차도〉는 45미터에 이르는 긴 행렬도로 6400여 명이 그려져 있어 실제 행렬에 가장 가깝다. 한편 규장각의 〈화성원행반차도〉와 의궤의 〈반차도〉는 1490여 명의 사람과 520필 정도의 말이 등장하고 있어 실제 행렬의 20% 정도만 묘사되어 있다. 보병과 마병의 숫자를 대폭 줄였고 품계에 따라 장수와 관원들이 거느리던 종자들을 대부분 생략하였기 때문이다.
의궤의 〈반차도〉를 토대로 행렬 편성을 살펴보자. 행렬은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도가(導駕) 행렬, 전방호위군인 선상군 행렬, 왕의 친위대인 금군, 혜경궁의 가교와 정조의 행렬, 장용영과 배종 관원, 가후 · 난후 금군, 후방 호위군 행렬로 편성되었다. 보통 도가 행렬은 행차하는 곳의 지방관이 맡았으므로 경기감사가 선두에 섰고 행사를 총괄한 총리대신 채제공이 다음에 섰다. 채제공은 화성에 먼저 가서 업무를 총괄하다가 윤2월 10일 화성의 장안문 전 진목정(眞木亭)에서 장용 외영의 군사들과 함께 어가를 맞았다. 하지만 행렬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도가 행렬의 책임자로 등장시킨 것이다. 다음으로, 전방 호위군인 선상군은 훈련도감에서 맡았다. 선상군에는 마병 200명과 보병 240명을 훈련도감 대장이 지휘하고 있다. 마병은 5기씩 대열을 이루어[五馬作隊] 행군하고 보병은 2열 종대를 이룬 3개 대가 나란히 행군하는[三隊平行]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음으로 금군과 가전별초군이 시위하고 이어 의장기가 섰다. 의장기는 도성 안에서만 배치하고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환궁할 때 다시 진열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어 정조의 가교와 둑, 용기가 서고 장용영 취고수 51명으로 이루어진 취타대와 대기치들이 배치되었다. 둑과 용기는 군대의 대장을 상징하는 기치이며, 취타대와 대기치들은 군사 대열을 통솔하는 데 필요한 악대와 깃발류이다. 군사 대열에서 “장관과 병졸은 귀로는 징과 북소리만 듣고 눈으로는 깃발의 모양과 색깔만 보아야 하며, 어떠한 사람이라도 말로 하는 지시는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되었다.” 즉 전체 대열을 지휘 통솔하는 최고 통수권자로서 국왕의 지위를 드러내고 실제로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것이다.
행렬의 중심인 어가 부분은 삼엄한 호위체계를 보여 준다. 선전관, 별군직, 어가를 특별 수행하는 장관들, 혜경궁의 가교용 예비 말, 왕의 갑옷을 실은 말, 왕의 예비 말들이 앞에 배치되고 혜경궁의 가교, 정조가 탄말이 나아갔다. 정조의 말 앞에는 근장군사와 무예청 군사 · 별감 · 순뢰수들이 특별 시위를 하였고, 의금부 도사가 이끄는 나장들이 정소인이나 격쟁인의 어가 접근을 통제하였으며, 무예청에서 작문(作門)하여 어가 주변을 호위하였고 협련군 300인이 어가를 에워쌌으며 그 뒤를 창검군이 다시 호위하였다. 무예청 무관들이 ‘문(門)’자 모양으로 시위 대열을 만들어 엄격히 출입을 통제하는 작문 시위 모습, 협련군과 창검군이 겹겹이 에워싼 국왕 호위 체계는 정조가 특별히 강조해 오던 시위 방식이었다.
이어 군주들이 탄 쌍교 2채와 외빈이 서고, 서리와 주서 · 한림 · 약물 대령 의관 · 등촉방 중관 · 가후 선전관 등 근신들이 수가하였다. 그 뒤로는 장용영의 마병 300명과 장용대장이 나아갔고 장용영 보병 240명, 승정원의 도승지와 승지들, 규장각 각신, 내국과 장용영 제조가 따랐다. 이어 가후금군 50인이 오마작대하여 나아갔고, 표기와 병조판서, 동반과 서반 관원들, 장용영 보병 360명이 섰다.
이 행렬은 정조가 원행할 때 편성하던 군사적 대오에다 도가, 혜경궁의 가교 행렬과 외빈 행렬을 추가한 것이다. 정조는 평상시 능원에 행차하면서 배종 군사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행하였고 행차 시에는 행렬 편성 지침을 반드시 엄수하도록 하였다. 군사와 장수는 물론이고 관원들까지 모두 화성에서의 군사훈련을 감안하여 군복인 전복과 전립 차림으로 행렬에 참가하고 있는 데서도 행렬의 군사적 성격을 알 수 있다.
도식적으로 묘사된 규장각의 〈화성원행반차도〉가 의궤에서 세련된 행렬도로 탈바꿈한 것은 정조의 어심이 반영된 결과이 기도 하다. 원행의 의의를 후세에 증명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정조의 특별하교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당시 행차를 “의(義)로써 처음으로 일으킨 일이고 예(禮)는 정리(情理)를 따른 것이므로 마땅히 징신할 만한 서책을 만들어 후인에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화원들 역시 그러한 국왕의 생각을 그림 작업에서 구현하여 늘씬한 조형의 인물들이 사실적으로 행군하는 행렬도로 재탄생시켜 의궤에 수록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본 세 행렬도들은 단일 행차를 기록한 그림으로서도 유례가 없다. 이들 그림들은 당당한 군사적 대오를 갖춘 가운데 어머니를 모시고 행차하는 국왕의 행렬을 시각화함으로써 효(孝)의 이미지와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동시에 상징하는 거둥 행렬도로 자리잡게 된다. 정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대로 “행행(行幸)이 백성들에게 고통스러운 노역(勞役)의 현장이 아니라 임금의 은택이 베풀어져 행운(幸運)을 주는” 행행도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역사, 행렬도의 역사까지 새로 쓰게 한 대사건이었다. 의리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 핍박받던 정조가 백성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당당한 군주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인인화락 2016년 가을호 Vol.16
글 : 제송희(한국학중앙연구원 백과사전편찬실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