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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중기

조선후기 정조시대에 왕의 명령아래, 수원화성을 쌓으려면 엄청난 길이에 과학기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동이 편리하고,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기기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고안한 것이 거중기이다.

그 당시의 토목기술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수려하고 견고하면서 비교적 적은 경비로 2년 반이란 짧은 기간에 성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계획 당시부터 실학자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등의 경륜과 지혜를 참작하고 지게에서 거중기 등 우리 고유의 각종 기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 기술의 장점을 응용하였고, 거중기 같은 기계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한편 다량의 석재를 가까이에서 채취하고 벽돌(전돌)을 구워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특히, 정조는 축성기술을 얻기 위하여 중국 가는 사신에게 명하여 구하고자 했던 "사고전서"는 구하지 못했지만 "고금도서집성" 5,022권을 거금 2150양을 주고 들여와 이중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5000근이나 되는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근대 실학 정신을 투영해 성벽 중 특히, 주요 방어시설을 모두 벽돌로 쌓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축성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손수 점검하고 결정하면서 무엇보다도 민폐가 없는 인화와 장인 솜씨를 발휘토록해 아름다운 벽돌성이자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 불리우는 수원화성이 탄생하였다.

최종수정일 : 2018년 04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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