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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 도설(圖說) 속 그림과 수원화성
  • 화성성역의궤 도설 속 그림과 수원화성 (선택된 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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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는 2천 개가 넘는 성곽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수원화성은 가장 뛰어난 성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남긴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입니다. 축성이 끝난 후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의 모든 내용이 담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편찬하도록 명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록된 『화성성역의궤』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 그려진 화성 시설물의 그림과 설명은 이후 보수와 복원에 적극 활용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복원사업에 가장 필요한 자료로 활용됩니다. 이는 훗날의 본보기로 삼고 후손들이 참고할 것을 예측했던 정조의 혜안이었습니다. 2017년 인인화락 가을호에 소개된 화성성역의궤 도설 속 그림과 수원화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화성성역의궤' 그림의 역할
수원화성을 호칭하는 대표적인 미사여구는 바로 ‘한국 성곽의 꽃’이다. 수원화성이야말로 우리 조상의 뛰어난 기술과 정신이 집약된 한국 전통건 축물의 정점이다. 20년 전인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력하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는 수원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사였다. 한국에서 성곽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다.
당시 수원화성은 등재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위원회는 복원된 유적지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조대왕의 개혁의지가 담긴 수원화성이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시설물과 성곽이 훼손되었고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파괴된 시설물이 복원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불식시킬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덕분이었다. 1997년 4월 유네스코에서 파견된 스리랑카 문화재 전문가 실바(Nimal De. Silva)교수에게 수원 출신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이 『화성성역의궤』 영인본을 선물하였고 이로 인하여 수원화성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민선1기 시장이었던 심재덕 전 시장의 역할이 컸다. 수원화성이 등재되기 20여년 전 1970년대에 실시되었던 ‘수원성복원정화사업’의 실무자들은 당시 사라지고 훼손된 상당수 시설물에 대한 복원을 위하여 여러가지 자료를 참고하였다. 이중 가장 많이 참고한 것이 『화성성역의궤』 이며 가장 앞부분인 권수(卷首)의 도설(圖說) 부분이었다. 도설은 화성의 그림과 설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수원화성의 전체적인 모습부터 주요 시설물의 내외 모습, 거중기를 비롯한 축성 도구와 주요 행사에 이르기까지 수원화성 축성에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져 있다. 수원화성이 완벽에 가깝게 복원될 수 있었던 것도, 훗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도 『화성성역의궤』 도설의 영향이 컸다. 현재도 미복원된 수원화성의 시설에 대한 조사에 적극 활용된다. 가장 단적인 예로 동북공심돈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외면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아있는 도면이나 내부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훗날 복원할 때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도설이 존재했기 때문에 나선형 계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설은 외도(外圖)·내도(內圖)·이도(裏圖)·전도(全圖)·분도(分圖)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도는 외도와 내도의 건축그림 중 정면을 자르고 내부공간을 묘사한 그림으로 등각투상도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성성역의궤』에만 있으며 서북공심돈, 동북공심돈, 포루(砲樓) 등 3개의 이도가 있다. 또한 이도에서는 누각을 없애고 정확한 비례를 맞춘 것이 아닌 내부에 대한 자세한 묘사에 공을 들여 표현에 있어 효과를 높였다.
한편 도설 속 그림과 실제 모습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 『화성성역의궤』 자체가 조선시대 『영건의궤(營建儀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형식과 방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어 완벽하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완벽하다기 보다는 ‘완벽에 가까운’ 책이다. 자세하고 치밀하게 화성 성역의 모든 것을 담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실물 자체를 완전하게 그림으로 옮긴 것이 아닌 해설을 위한 그림이기 때문에 미필적인 왜곡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따금 연구자들이 수원 화성 복원에 대해서 도설과 다른 부분에 대한 오류 제기를 하는데 주장 중 일부는 타당하며 일부는 지엽적인 부분도 있다. 도설이 완벽하다는 관점이라면 팔달문 지붕 잡상 숫자나 석재 숫자까지도 의궤에 맞춰야한다. 그러나 실제는 절대 그렇지 않다. 한정된 크기의 지면에 건물의 특성을 그림으로 표현함에 있어 실물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970년대 복원사업이나 현재의 복원사업도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의궤 그림과 다르다고 무조건 잘못된 복원이라는 것은 다소 무리인 주장이다.

'화성성역의궤' 도설과 실제 시설물 비교
『화성성역의궤』 권수 도설 그림 중 현재 모습 중 실제 모습과 차이가 있는 것 일부를 보자면 먼저 장안문과 팔달문의 예를 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옹성 위의 누각이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 장안문과 팔달문 옹성 위의 누각은 원래 만들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화성성역의궤』에 기재되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 옹성 위 누각은 1824년(순조 24)에 만들어졌다. 이는 축성 이후 최초로 수원화성 건축물의 변화였다.
위급상황에 봉화를 올리는 봉돈의 도설을 보면 원래 봉돈 입구 좌측의 무기고, 우측의 숙직소는 결코 성곽 밖에서 볼 수 없다. 의궤 도설에는 시설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일부러 사실과 다르게 그린 것이다.
정조가 을묘년인 1795년에 팔달산 정상에 올라 군사훈련을 하던 서장대를 보면 서장대 후미에 서노대가 있으며 그 중간에 군사가 숙직을 하던 후당(군직소)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수원성복원정화사업’ 때 후당복원은 열외였으며 현재까지도 미복원 상태이다.
동북공심돈 이도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종의 투시도이며 공심돈 상단에 누각이 빠져있다. 이는 내부 표현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다. 의궤 속 그림의 동북공심돈은 원형에 가까우나 현재 모습은 타원형에 가깝다. 이에 대해 잘못된 복원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의 사진을 확인해 보면 남아있는 시설물 하부를 기준으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수원화성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남각루(방화수류정)는 한국의 정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외형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방화수류정에 오르는 계단은 원래 2개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수리하는 과정에서 좌측 계단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수원화성의 미복원 시설물
정조의 서거 이후에도 수원화성에 대한 관리와 보존은 충실히 지켜졌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일제는 수원화성에 대하여 방치와 고의적인 훼손을 하였고 필요에 의해서만 제한적으로 관리했다. 그리고 도로를 내기 위하여 화성 성곽 구간 중 무려 11군데의 구간을 철거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위원회의 권고로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고 부득이하게 복원하기 어려운 부분은 육교로 성곽잇기 공사를 실시하였다. 대표적인 예는 2006년도에 실시된 장안문 성곽잇기 공사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이후 팔달문과 마찬가지로 로터리 형태를 유지했으나 2006년도의 공사 이후 장안문에서 북서적대 구간은 성벽 전체를 다시 복원했고 북동적대 방향은 육교 형태로 복원했다.
1846년(헌종 12) 수원천 일대의 성곽이 홍수로 인해 훼손되었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수원천 일대는 수해를 겪었다.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적합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1922년 여름의 기록적인 홍수는 화홍문과 남수문, 매향교를 완전히 파괴시켰다. 일본은 강제로 병합한 식민지의 유적지 복원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남수문 주변의 성벽을 고의로 철거하였다. 그 때문에 남수문을 비롯하여 남암문, 남공심돈, 남동적대, 남서적대, 남은구 등의 시설이 사라졌다. 이후 이 일대가 시가지화 되었기 때문에 1970년대 수원성복원정화사업 때도 이 구간을 복원하는 것은 가능했으며 지금까지도 복원이 어려운 상황이다. 성곽 대부분을 복원하고 도로가 만들어져 불가피하게 복원할 수 없는 성곽은 보도육교 형태로 성곽잇기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남공심돈 주변만큼은 복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남치에서 팔달문, 팔달문에서 남수문 사이의 미복원 성곽 구간은 약 300m 정도이다. 성곽 시설물 중 복원하지 못한 곳은 총 11개소이다. 4대 문 뒤에 위치한 수문청 4기, 남암문 북은구(北隱溝)와 남은구, 남공심돈, 중포사, 남동적대, 남서적대 등이다.
화성행궁은 일제의 강제병합 전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자혜의원이 들어섰다. 조선시대 최고의 행궁인 화성행궁은 낙남헌을 제외하고 전부 철거 되었다. 현재 화성행궁은 2000년대 초반에 복원된 것이며 원래 건물이 전부 복원되지는 않았다. 현재 미복원 된 화성행궁 건물은 장춘각, 별주(분봉상시), 우화관 등이다. 남은구로 물이 빠져나가던 남지(南池), 북은구로 물이 빠져나가던 북지(北池), 수원화성박물관 주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지(東池) 등의 연못들은 현재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 외 부대시설 중 미복원 된 것은 서장대와 14 SWCF Magazine 2017 Autumn 15 서노대 사이에 있던 후당(後堂), 감영(監營)이 설치된 지역의 군무(軍務)를 맡아보는 관아인 이아(貳衙), 화성유수부의 군무를 담당하던 중군(中軍) 관할의 중영(中營), 별군관청, 형옥, 강무당, 무고, 수성고, 남창, 북창, 동창, 영화역, 사직단, 지소 등이다.
2010년대 이후 수원화성의 미복원 시설이 복원되는 몇 가지 사례가 있었다. 1922년 홍수로 인해 사라진 남수문은 90년 만인 2012년에 복원되었다. 일제에 의해 사라졌던 성신사 (城神祠)는 2009년에 복원되었다. 2015년에는 이아 터가 발견되어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직단(社稷壇)과 문선왕묘(文宣王廟)터에 대한 발굴조사도 이루어진 상태이다. 또한 우화관의 복원계획에 따른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이후의 복원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인인화락 2017년 가을호 Vol.20
글 | 조성우(수원화성박물관 전문위원)

최종수정일 : 2022년 1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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