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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의 창건경위와 주요행사

화성성역의궤에는 행궁을 구성하는 각 중요건물에 대한 창건경위와 용도 규모를 밝혀 놓고 있다. 내외의 행각은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21칸, 행각 43칸이던 것을 정조 18년에 북각도 등 48칸을 새로이 추가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또한 『정조대왕능행도(正祖大王陵幸圖)』에는 「융릉행반차도(隆陵幸班次圖)」·「성역낙성연(城役落成宴)」·「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에서부터 화성행궁을 배경으로 한 「알성도(謁聖圖)」·「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 등의 그림이 사실적인 채색화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장남헌은 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주갑년(周甲年)을 맞아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봉수당'으로 편액했다. 내외의 행각은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21칸, 행각 43칸이던 것을 정조 18년에 북각도(北閣道) 등 48칸을 새로이 추가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다음 장락당(長樂堂)은 정조 18년 2월에 새로 지은 것으로, 봉수당과는 서쪽으로 연접해 있는 7량 13칸의 건물이며, 장락당 앞에는 10.5칸의 경룡관(景龍館)이 있어 아래는 3문이고, 위는 다락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봉수당과 장락당은 행궁 내의 가장 중요한 전각인데, 정조의 전교 가운데 다음과 같이 이 건물의 건립과 편액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봉수당은 곧 나의 자궁(慈宮)을 받들어 잔으로 수(壽)를 드리는 곳이며, 장락당은 대개 한(漢)나라의 궁실 이름에서 취한 것이지만,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니라."
내당인 복내당(福內堂)은 정조 13년에 새로 건립된 5량 18칸, 내외행각 29칸의 건물로서 서쪽에서 동향으로 위치해 있는데, 정조 18년에 서별당(西別堂) 외 205칸을 중건하여 67.5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별당인 유여택(維與宅)은 왕의 거둥 때 소차(小次)하는 곳으로, 정조 14년 봄에 은약헌(隱若軒)을 복내당 동행각(東行閣) 밖에다 지었는데, 정조 19년에 편액을 바꾸어 유여택이라 하였다. 이 건물 처음에 정당 5량 8칸, 부사문(附舍門) 등 20칸, 도합 28칸을 새로 지은 후 정조 20년 여름에 각도(閣道)의 50칸을 추가하여 그 규모는 78칸을 헤아렸다. 이 건물은 평상시에 수원부사의 침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낙남헌은 처음에 득중정이라 편액했던 것을 고친 건물이고, 후에 행궁을 만들면서 옛 건물인 득중정은 아예 뒷편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신건했다는 것이다. 이 낙남헌은 정조 13년 옛건물 장춘각(藏春閣) 5칸에, 정조 18년 정당 7량 14.5칸, 노래당(老來堂)의 29.5칸을 추가하여 49칸의 건물로 증축되었다.

정문인 신풍루는 정조 13년 누문 6칸을 짓고, '진남루(鎭南樓)'라 편액했던 것을 정조 18년 남·북군영을 누대 좌우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좌우각간(左右閣間) 21칸을 추가하여 27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화성성역의궤}는 "행궁 밖 3문의 윗층을 신풍루라 한다. 그 제도는 6칸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유년(정조 13)에 지은 것으로 처음 이름은 지남주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서 '신풍'이란 이름은 한고조(漢高祖)의 발상지인 풍패(豊沛: 흔히 '豊沛之鄕'이라고 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풍'은 바로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행궁과 별도로 공해에 속한 건물로 남·북군영 행각 62칸, 외정리소 27.5칸, 비장청14.5칸, 서리청·집사청 외 83칸의 건물을 신축하니, 행궁과 부속 관아 건물은 총 576칸의 장대한 규모를 이루었던 것이다. 공해건물은 이밖에도 행궁에서 좀 떨어진 팔달산 왼쪽 기슭에 위치한 강무당행각 66칸, 무고행각(武庫行閣) 56칸, 수성고(修城庫) 22.5칸, 그리고 광교동 입구에 위치한 지소(紙所) 25칸 등이 신건 또는 중건되었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12차에 걸친 원행 때마다 단순히 왕이 잠깐 유수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정조는 왕 19년 행궁이 완공된 후 이곳 봉수당에서 자친(慈親)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성대한 진찬례를 베푼 것을 비롯하여 낙남헌에서 베푼 양로연(養老宴)과 몇 차례의 문·무과 별시, 득중에서의 어사(御射)와 배사(陪射)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신풍루에서 베푼 빈민에 대한 친임사미(親臨賜米), 그 밖에 수원부와 인접 민인들에 대한 급복(給復)·진휼(賑恤) 등 각종의 특별조치를 자주 내린 바 있었다.
행궁에서 치러진 행사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을묘년(정조 19, 1795)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현륭원을 참배하고 행궁에서 전찬례를 올린 행사일 것이다. 당시 이 행사의 내용을 글로써 상세히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려 이를 책자로 편찬·간행한 것이 바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무엇보다 이 을묘년 회갑 행사를 위하여 정조는 10만 3천여 냥의 재원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그 자금 모두를 어머니의 회갑을 위해 쓰지 않았다. 그 자금의 일부를 떼어내어 제주도의 진휼곡(賑恤穀)으로 보내는 한편, 당시 새로 조성한 화성둔전을 매입하는데 충당하기도 하고, 행사 후 남은 자금을 3도(都)와 8도에 분급하여 진휼곡으로 쓰도록 하였다. 특히 정조는 원행을 위해 조성한 자금을 화성둔전에 투자하고, 이때 마련된 을묘정리곡(乙卯整理穀)을 수원에 집중시키는 등, 원행자금의 운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거점인 수원을 성장시키는데 노력하였다.

한편 화성행궁에는 재용(財用)과 고사(庫舍)를 관장하는 외정리소와 외탕고·내탕고 등을 두어 행궁의 유지·수리 등을 맡아 보았다. 화성행궁에서의 을묘년 회갑 행사는 ① 봉수당에서 거행된 성대한 진찬례, ② 낙남헌에서 베푼 양로연회, ③ 득중정에서의 활쏘기, ④ 신풍루에서 베푼 수원 부민들에게 내린 사미(賜米)의식, ⑤ 우화관(于華館)에서의 문과 별시와 낙남헌에서 시행한 무과 별시 등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제6차 현륭원 원행 때인 정조 19년 윤2월 11일 화성에 도착한 정조는 화성 성묘(聖廟, 공자 사당)를 배알하고 새로 인출(印出)한 사서삼경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어 우화관과 낙남헌에서 문·무과 별시를 각각 시행, 유생 최지성(崔之聖) 등 5인과 무사 김관(金寬) 등 5인을 선발하였다. 이때의 모습은 그림 [낙남헌 방방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12일 혜경궁을 배행(陪行)하여 현륭원을 전배한 뒤 화성의 장대에 올라 성상 조련과 야간조련을 참관한 뒤 낙남헌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 윤2월 13일 혜경궁의 회갑연인 진찬례가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혜경궁의 내외빈 82명, 양로연시 수가(隧駕)노인이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78세)·우의정 채제공(蔡濟恭, 76세) 등 15명과 이들의 아들·손자 등 23명, 그리고 화성부 노인 전 오위장 최상후(崔尙厚, 84세)·전 참의 이석조(李奭祚) 등 384명이 연회에 참석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봉수당진찬도의 그림을 보면, 건물에는 거북무늬의 발이 쳐져 있고 그 앞으로 장막이 드리워졌으며, 건물 앞으로 여러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기생들의 춤이 벌어지는 주변에 여러 대신과 무관들이 바른 자세로 둘러앉은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편 [낙남헌 양노연도]에 나타난 당시 행사 모습을 보면, 건물 한 가운데 임금의 옥좌가 있고 그 좌우에 각 두 줄로 5인씩 앉아 있으며,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서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건물 밖 기단 위에도 두 줄로 11명이 서 있고, 기단 아래 마당에는 한 가운데에 5명씩 7줄을 이루어 사람들이 앉아 있으며, 그 좌우로 각 3열의 군사들이 도열하고 있다. 가장 뒷쪽에도 큰 북을 앞에 놓고 53명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날 양노연에 참여한 노인 중 70세 이상과 61세된 노인에게는 각각 비단 1필씩을 하사하고, 현륭원 아래에 사는 주민에게는 복호 2년을, 그리고 부성(府城) 내외민에게는 복호 1년을 각각 가급하였다. 그리고 화성성역을 담당한 우의정 채제공에게는 호피(虎皮)를, 화성유수 조심태에게는 가자(加資)를, 이유경(李儒敬)에게는 갑옷을 하사하였다.

다음날인 윤2월 14일에 정조는 신풍루에 임어하여 사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기민(饑民)에게는 죽을 나누어 주었다. 수원부 사민 539명에게는 쌀 198석 10두, 기민 4,813명에게는 쌀 169석 9두 7승, 소금 12석 12두 9승 9홉, 죽미(粥米) 9석 9두 2승, 미역 925립, 간장 1석 12두 7승 4홉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낙남헌에 임어하여 양로연을 베풀었다. 양로연에는 수가노인 홍낙성 등 15인과 화성부의 사서(士庶) 노인 전 참의 이석조 등 384인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날 저녁때에는 득중정에 임어하여 활쏘기를 하고 매화포(埋火砲)를 관람하였다.

최종수정일 : 2018년 04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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